■ 원균과 칠천량해전 1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1편
원균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대패(大敗)한 칠천량해전을 이끌다 전사(戰死)했다. 그것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다가 전사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이순신장군이 민족의 영웅으로 각광 받는 것과는 달리, 원균은 임진왜란 중 대표적인 비겁하고 무능한 장수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대패의 참극(慘劇) 그 모든 과정이 원균만의 잘못이었을까? 당시 왕인 선조와 조정 신료들, 그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에게 우리 수군을 맡긴 것이 바로 그들이고, 원균의 인사가 잘못되었음을 기문포해전에서 이미 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고, 무작정 바다로 그를 내몰았던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고, 그 속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그러나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했던가.
무신 집안에서 태어난 원균(1540~1597년)은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고 용맹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른 공으로 조정으로부터 신망을 얻어 부령부사로 특진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겨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하는 데도 공을 세워 경상 우수군절도사(右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고, 3개월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은 양국 간의 전쟁 준비 격차로 인해 전쟁 발발 초부터 우리의 일방적인 패주(敗走)의 연속이었다. 관군을 이끌던 명관(名官)들은 앞 다투어 도주하고, 백성들은 모두 산간으로 피난해 성읍(城邑)이 모두 텅 빈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 제일의 요충인 경상좌수영의 수사 박홍(朴泓) 이하 모든 장병이 도주해 싸워보지도 못한 채 완전 궤멸되었고,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영 관할의 장병들도 거의 흩어져 휘하에는 약간의 장병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원균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해 고군분투하면서 몇 차례에 걸친 원병 요청 끝에 마침내 전라좌수영의 이순신장군의 원병이 도착하자 합세해 옥포(玉浦)·당포(唐浦) 등지에서 연전연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포상 과정에서 이순신과의 공로 다툼이 심해 불화가 발생하였다. 급기야 1593년 8월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원균은 이에 크게 반발했고, 이듬해 12월 충청병사로 전출되었다가 얼마 뒤에는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