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균과 칠천량해전 3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3편
이 기문포 해전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전(敗戰)이다. 그리고 심각한 외교 문제까지 야기 시킬 뻔 했다. 또 약속을 어기고 신의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나라의 위신이 실추되었고, 조선의 지휘관들 사이에 서로 업무 협조가 원활하지 않다는 약점을 일본군이 훤히 알게 하였다. 선조를 기망(欺罔:기만)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기망조정(欺罔朝廷). 이순신장군이 파직되고 백의종군된 이유였다. 통제사 원균의 실책은 실로 무겁고, 중대한 사안이다. 그런데 왜 원균은 처벌도 없이 유야무야된 것일까? 같은 사안에 대해 조정 대신들은 왜 이순신장군은 그렇게 탄핵해 놓고, 원균에 대해선 입을 닫고 있었을까? 열심히 나라를 지킨 이순신에 대한 질투에서 야기된 그릇된 탄핵과 인사에 대한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어서인 것은 아닐까?
이후 원균은 선조의 기대와는 달리 이순신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걸었다. 작전은 고사하고 이순신이 만든 조선 수군의 작전회의실 운주당(運籌堂)에서 기생을 불러다 같이 놀며 술을 마시기도 했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해 섬멸하려고 일본의 이중첩자인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유혹했다. 이에 도원수 권율(權慄)은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상의해 원균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임명된 원균도 통제사가 되기 전의 자기주장과는 달리 사태의 불리함을 깨닫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출전하지 않는다. 특히 육군의 엄호 없이는 출전할 수 없다며 3월 29일 장계를 통해 30만 대군으로 안골포, 가덕도 등지의 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장계를 올린다. 조선 육군의 병력 규모를 몰랐거나, 부산포 공격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해서 출정을 피하려 한 듯하다.
통제사 원균은 또다시 조정의 재촉을 받고 어쩔 수 없이 6월 18일 한산도 통제영을 출발, 거제 장문포를 거친 다음 안골포와 가덕도를 공격했는데, 적선 2척을 빼앗았을 뿐, 큰 성과없이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평산만호 김축이 부상을 입고, 보성군수 안홍국이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전선(戰船)의 피해는 없었지만, 주요 지휘관에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상당한 손실이었다.
원균은 이 출전으로 왜선 10척을 부수고 판옥선 32척을 잃는, 이순신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패전을 한 뒤 한산도로 돌아왔다. 이전까지 원균은 전투 지휘관으로서 능력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이 전투에서 원균이 사실상 처음 보여준 지휘 능력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그렇게 성과 없이 엄청난 손실만 입고 철수해 돌아온 통제사 원균에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조도 이제는 계속된 작전 실패와 패전에 크게 실망하면서 원균에게 최후 통첩성 경고를 했다. 그리고 도원수 권율 장군의 소환명령을 받았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