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녀醫女 1편
■ 의녀(醫女) 1편
조선시대의 대표적 여성전문직을 들자면, 의녀(醫女)와 다모(茶母)가 있다. 이 두 가지 직업을 가진 여인들의 이야기가 오래 전 TV드라마에서 다루어진 적이 있다. 무척이나 흥미로운 전개로 많은 인기를 끌어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한 단어이다. 하지만, 이 두 직업군이 생긴 이유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남녀가 유별하고 남녀의 일이 구별되어 있던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관념 때문이었다. 의원들이 모두 남자였으므로 사대부가의 여자들은 아파도 제대로 진찰을 받지 못했다. 남녀가 유별하니 낯선 남자에게 손목을 잡히거나 몸을 이리저리 살피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반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왕실의 왕비나 후궁들도 더욱 그러하였으리라.
1406년(태종6년) 조선건국 14년 만에 제생원지사 허도(許衜)의 건의로 제생원에 의녀제도가 만들어졌다. 제생원은 백성의 질병 치료와 구호사업, 의녀 양성, 의학서 편찬 등의 의료사업을 수행한 기관이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관비(官婢) 중 똑똑한 어린 여자 아이 10명을 뽑아서 제생원에서 의술을 가르쳐 부녀자를 치료하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조선시대 역사 상 최초로 의녀가 탄생했다. 여의(女醫)는 당시 중국이나 서양 역사상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직업이었다. 이때 뽑은 10명 중에 여의로 성장한 사람은 모두 7명이었다. 7명 중 의녀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인원은 5명 뿐으로, 제생원은 5명으로 부인병을 치료하는데 한계가 있었기에 또 다시 의녀를 뽑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태종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10명의 의녀 후보생을 다시 선출하였다.
이렇듯 초기에는 부정기적으로 의녀를 뽑아 양성했지만, 의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3년마다 한번 씩 정기적으로 뽑았다. 그 후, 의녀는 관비(官婢)들이 매우 선호하는 직업이 되었다. 이들 의녀에 대한 교육은 초기에 모두 제생원에서 했다. 세조 이후 제생원이 사라지면서 전의감과 혜민서에서 의녀를 교육하였다. 이런 의녀를 뽑는 선발 과정이나 교육 과정은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의녀는 먼저 각 지방의 관비 중에서 10~15세 사이의 어린 여자를 각각 2명씩 선택하여 제생원으로 보낸다. 처음엔 이렇게 보내진 여자들이 의술을 배우고 그 중에 총명한 의녀를 선발하여 글공부를 시키게 하였으나, 나중에는 아예 지방에서 천자, 효경 등의 서책을 먼저 공부시켜 글을 어느 정도 익힌 후에 선발하여 올려 보내게 했다. 이렇게 의녀가 되면 한 달에 한 번씩 지정된 의서(醫書)에 대한 시험을 본다. 시험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얻은 3인은 보너스를 주고, 시험에 3번 이상 낙제하면 의녀에서 탈락된 후 다모(茶母)라 하여 관청의 식모로 강등당했다. 하지만 낙제를 하지 않아도 40살이 될 때까지 어느 한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면 고향으로 돌려보내지고 말았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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