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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5일 금요일

의녀醫女 4편

■ 의녀醫女 4편

■ 의녀(醫女)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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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의녀 중 가장 뛰어난 의녀는 중종때 왕을 보필했던 어의녀, 드라마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대장금’이다. 기록에 의하면 약 30년 동안 중종의 ‘어의녀’로 지냈다. 대장금은 의술은 물론이고 요리 솜씨도 뛰어나 중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요리사였다거나 어의라는 구체적 기록은 사실상 없고, 그녀의 행적에 대해서도 뚜렷한 자료는 없다. 사실 ‘장금이’에 대해 직접 언급된 실록의 기록은 딱 9건 뿐이다. (직접 이름이 거론 된 게 9번이고 이름이 거론되진 않았지만 ‘장금이’로 추정되는 의녀에 관한 언급은 물론 더 많다.) 대장금에 대한 첫 실록은 중종 10년이고 마지막 기록은 39년이니, 최소 29년간 궁에서 일했던 의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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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녀의 집안은 양인에게 부과하는 조세나 요역의 부담으로부터 감면 받거나 면제 받았다. 즉, 그녀들은 공로에 따라 물질적 포상을 받았다. 포상 중 가장 으뜸은 천인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는 것이지만, 그 기회가 드물기는 해도 의녀의 신분상승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의녀는 의료에 관한 일만 했을까? 의료 이외에도 의녀들의 활동 분야는 다양했다. 그녀들은 여성범죄 혐의자나, 여성 피해자에 대한 수색, 조사 그리고 사치풍조를 단속할 때는 규방까지 들어가 조사를 할 수 있었다.

의녀의 활동과 지위에 가장 많은 영향(해악(害惡)에 가깝다)을 끼친 왕은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채홍준사(採紅駿使)’ 라는 관청을 두고 의녀를 기생화 했다. 의녀는 시가(詩歌)와 글에 능했기 때문에 사대부와 대적할 정도의 지적 수준을 겸비했기 때문에 술자리 시중을 들게 한 것이다. 한양 각 관청에서 잔치가 있을 때마다 의녀에게 강제로 음악을 배우게 해 기생의 역할까지도 함께 수행하게 하여, 연회가 있거나 행사가 있을 때 기생의 수가 부족하면 화장을 하고 기생으로 참가하여 술자리 시중도 들게 했다. 연산군이 잔치의 흥을 돋울 때 기녀와 함께 의녀를 동원한 것이다.

내의원의 별칭이 약방(藥房)이고, 기생으로 동원되니 의녀들이 ‘약방 기생’이라 불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 후 국가 연회, 양반집 잔치에도 불려 다녔다. 사대부들이 교양을 갖춘 의녀들을 통해 잔치의 품격을 높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천민 여성이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유일한 집단으로, 의원을 보조하고 본업 외 수사관, 거기에다가 기생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주요한 임무는 궁녀들에게 침을 놓아 주거나, 비빈들의 해산에는 조산원 노릇을 하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가 있을 때에는 기생이 되어, 원삼을 입고, 머리에 화관을 쓰고, 손에는 색동 한산을 끼고 춤을 추는 무희의 역할도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의녀가 의술을 배울 시간이 부족해지고 그 폐단이 심해지자, 중종 때부터는 이를 금지하고 아주 엄하게 단속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