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적 임꺽정 2편
■ 의적 임꺽정 2편
임꺽정은 힘이 천하장사였다. 그는 아마도 도적떼뿐만 아니라 수백 년 이래의 장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가는 힘의 소유자일 것이다. 임꺽정은 십여 명의 의형제를 모아 휘하의 두령으로 삼았다. 임꺽정은 백정 출신이었지만,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신분이 다양했다. 상인, 대장장이, 노비, 아전, 역리 등 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임꺽정은 자신만의 리더십으로 이들을 이끌었다. 임꺽정의 활동 무대는 처음에는 구월산·서흥 등 산간지대였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고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지면서 평안도와 강원도, 안성 등 경기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관군들이 임꺽정의 세력이 커질 때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황해도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임꺽정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관에서 잡으려고 하면 그 사실을 미리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임꺽정 부대의 규모 · 전술과 활동 거점에 대해서는 《명종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창, 칼, 활, 도끼 등 단순한 무기로 무장했을 뿐 총포류 등의 화약 무기는 없었으므로, 관군에 비해 화력과 병력면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고, 관군과 맞대고 교전할 수는 없었다. 대신 지형지물에 익숙하여 기동력 면에서 탁월하였으므로 산악 지형을 활용한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였다. 당시 지배층은 임꺽정 부대가 수령들을 거리낌 없이 처단한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나라를 욕보이고 국가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행위이다. 임꺽정 부대는 단순히 물자를 약탈하는 도적떼인 ‘군도(群盜)’가 아니라 국가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역집단인 ‘반적(叛賊)’으로 간주되었다.
1559년(명종14년)에는 개성(開城)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자,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의 소굴을 소탕하러 갔다가 오히려 살해되기도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개성부 유수에게 도둑의 두목을 잡으라는 엄명을 내렸다. 한 달이 지나도 잡지 못하자 임금은 도둑잡기를 게을리 하는 수령에게는 엄벌을 가하고 공을 세우면 후한 상을 내리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작은 도둑무리만 잡았을 뿐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560년 8월에는 서울까지 임꺽정과 그 일당이 출몰하였다. 장통방(長通坊: 종로구 종로2가 부근)에서 그들을 잡으려 하자 활을 쏘아 부장(部將)을 맞히고 달아났는데, 이 때 임꺽정의 아내와 졸개 몇 사람이 붙잡혔다. 임꺽정의 아내는 형조 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이 해 10월에 금교역(金郊驛)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봉쇄하고 연도를 삼엄하게 경비하였지만, 이들은 봉산에 중심 소굴을 두고 평안도의 성천·양덕·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지에 출몰하며 더욱 극성을 떨었다. 이들은 황해도에서 빼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기도 하고 서울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약탈을 일삼기도 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