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몽학의 난 1편
■ 이몽학의 난 1편
역사상 어느 인물의 공과(功過:공로와 과실)를 논할 때,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 할지라도 전혀 결점이 없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개인사적이든 정치적이든 다소의 실수나 실책은 있기 마련이지만, 그가 남긴 공적이 그것을 덮을 만큼 크다면 우리에게 역사상 위인으로 이름을 남길 수가 있을 것이다. 선조에 대한 평가도 다소 복합적이기는 하나, 우리에게는 비겁하고 무능한 임금이라는 이미지가 크다.
선조는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먼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으나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선 최초로 방계 혈통으로 왕위에 즉위하였다. 선조는 이 점이 항상 열등감으로 작용했다. 실록에 나오는 선조에 관한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다.
『선조는 즉위 초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여 매일 강연(講筵)에 나가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다. 이전까지 조정의 주 세력이었던 훈구세력(勳舊勢力)을 물리치고 사림(士林)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명유(名儒)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등을 극진한 예우로 대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힘을 다하기도 하였고, 두 대비마마 모시기를 친어머니 섬기듯 효성이 지극하였다. 성품 또한 검소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색(色)이나 오락에 괘념하지 않았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음식과 의복도 절제하여 비빈이나 궁인들까지도 감히 사치하지 못하였다. 항상 절약하고 농민들의 노고를 생각해 한 톨의 낟알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
이 내용으로 보면 선조는 천성이 검소하고 효심이 깊으며,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 또한 소홀치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인물의 진가(眞價)는 위기 때 발휘되는 능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데, 선조는 이러한 점에서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다. 평상시에는 군주로서 봐줄만한 리더쉽을 갖고 있었지만, 위기 시에는 최악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적으로는 큰 불행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가 했던 행동은 백성들을 크게 실망시켰고, 그 중에서도 의병에 대한 대우와 처리는 최악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땅에 상륙한 일본은 지리멸렬한 관군의 큰 저항없이 파죽지세로 수도 한양까지 밀고 올라갔다. 하지만, 상상치도 못했던 복병(伏兵)을 만나 전황(戰況)이 크게 바뀌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당시 의병장들로는 김덕령, 곽재우, 고경명, 조헌, 영규대사, 서산대사, 사명당, 정문부 등이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이들은 역사에 이름이라도 남는 의병장이 되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이름 없는 의병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왜군과 싸우다가 죽어갔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