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몽학의 난 2편
■ 이몽학의 난 2편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들은 모두 양반 출신들이었다. 구한말 의병으로 신돌석이라는 평민 의병장도 있기는 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반 백성이 의병장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올바른 의식을 가진 양반들이 의병장으로 나섰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일반 백성들은 의병으로 나서서 목숨 바쳐 왜군과 싸웠다.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전쟁으로 전국의 농촌은 황폐화되고, 은결(실제로 경작하고 있으면서 국가 토지대장에서 빠진 토지. 즉 세금을 안내는 토지)은 증가되고, 국가재정은 악화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관리들의 부정행위는 더욱 악랄해졌다. 조선의 지배계층이나 토착관리들은 전쟁의 와중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일본과 잠시 휴전하는 동안에도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다시 수탈하기 시작했다. 또 일본의 재침략에 대비한 산성 축조 등으로 농민들의 삶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다. 전쟁 초기에 큰 활약을 했던 각지의 의병들은 전쟁이 장기화되고 유능한 의병장들이 관인이 되거나 전사함에 따라, 의병으로서의 기능은 약화되어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중들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명(明)·일(日) 사이에 강화(講和)를 둘러싸고 찬반양론의 논쟁이 치열하였다. 일본의 재침을 방비하기 위해 각처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민중의 부담이 가중되자, 민중의 원성과 고통은 확대되어가고 있었다. 장기간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의 삶은 비참해지고 조정에 불만을 품은 사람도 늘어났다. ‘이몽학의 난’ 역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어났다.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순식간에 많은 사람이 이에 호응한 것도 이 같은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던 민중의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다.
이몽학의 반란 과정에서 사실상 도화선 역할을 했던 인물은 한현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그 공으로 1594년(선조 27) 겸사복(兼司僕)이 되었다. 그 뒤 이시발(李時發)의 휘하에서 충청도 지방의 속오군을 훈련시켰는데, 이때 반란을 획책하여 그 부하로 있던 이몽학을 사주하여 거병하도록 했던 것이다. 한현이나 이몽학은 각각의 직책과 활동 속에서 당시 전쟁으로 인해 각종 부담에 시달리고 있던 백성들의 고통과 그에 따른 불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거사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였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