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몽학의 난 4편
■ 이몽학의 난 4편
명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점차 조선에 유리해지자 의병을 독려하던 선조의 태도가 급변한 것이다. 선조는 의병을 관군으로 흡수시키라는 명을 내리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었고, 결국에는 의병들이 군량미만 축내고 있다며 강제 귀농 조치를 명했다. 사실상의 의병 해체 작업을 실시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의병들에게 돌아온 것은 바로 군량미나 축내는 쓸모없는 사람 취급뿐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자신들의 과오(過誤)가 드러나고, 전공(戰功)이 의병들에게 돌아갈 것을 두려워하였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참으로 치졸하고 한심한 군주에 그 신하들이다.
의병으로 나섰던 백성들은 이에 크게 분노했지만, 자기들이 의병으로 나선 것은 어차피 선조나 조정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나라와 자신들의 고향과 가족들을 위해 싸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만을 누른 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선조와 조선의 관료들은 의병들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일본과 잠시 휴전하는 동안에도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다시 수탈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 때 일어난 것이 ‘이몽학의 난’이었고, 이 난을 계기로 선조는 의병장들을 반역자로 처리하는 좋은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이몽학의 난으로 인하여 선조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이 때문에 의병장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이순신 등 공훈이 많은 관군 장수들 역시 의심하며 경계하였다. 이 덕에 본의 아니게 원균이 선조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선조가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해 원균을 우대한 것이다. 사실 이몽학의 난 이전까지만 해도 선조는 상대적으로 이순신의 후원자에 가까웠다. 애초에 북방에서 이일의 장계를 받고도 백의종군으로 처벌을 낮췄고, 평소대로라면 수군절도사로 진급할 수 없는 낮은 계급이었던 이순신을 고집을 피워 전라좌수사로 임명한 게 선조였다.
선조는 전쟁이 끝난 후 이순신 같은 명장들이 민심을 얻고 의병장들 또한 전공을 차지하는 것을 두고 볼 만큼 현명한 명군(名君)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조는 그들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 간 선조를 위협하는 세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조는 의병장 중 단 한 명도 공신으로 칭하지 않았고, 의병들을 해체하거나 김덕령처럼 역모를 뒤집어 씌워 죽이기까지 했다. 오죽하면 이순신장군의 최후에 대해서도 그러한 결과를 예견하고 마지막 전투가 될 노량해전에서 전사를 가장하여 자살을 한 것이라는 가설과 추측도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때는 의병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몽학의 난은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임진왜란을 통해 극심한 사회적 모순과 민심의 이반 현상이 상당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안 지역에서 이몽학의 반란군에 얼마나 호응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충청도에서 반란군이 승승장구한 것은 이 지역의 민심이 어떠하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