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방원 VS 이성계 3편
■ 이방원 VS 이성계 3편
이방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조의 증오심은 사라지지 않았고,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그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아예 태종과는 한 궁궐 내에서 살고 싶지도 않았는지 태종이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강산으로 훌쩍 떠나버리고는 함경도 안변까지 행차했다. 이후에도 태조는 자주 순행에 나섰고 점차 그 횟수는 늘어났다. 심지어 태종이 배웅을 나오는 것도 싫었는지 순행을 나갈 때면 일부러 항상 한밤중에 출발하기도 하였다.
특히 태조는 소요산에 순행 나가는 것을 매우 좋아했는데, 이에 태조는 소요산에 아예 행궁을 지어놓고 그곳에 거주하며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오명을 씻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던 태종의 입장에선 체면이 말도 안 되게 구겨져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강제로 끌고 올수도 없으니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소요산에 자주 행차하여 태조를 직접 만나는 것 뿐 이었다. 이후 태종은 수차례나 소요산 행궁으로 행차하였으며, 여의치 않을 때는 태조와 친했던 대신들을 보내 환궁을 건의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태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태조와 태종의 관계는 계속 좋지 못했는데, 태종 2년 11월 5일, 드디어 일이 하나 터져버렸다. 그것은 함경도 안변부사 조사의가 신덕왕후의 복수를 하겠다며 난을 일으킨 것이다. 반란이 일어난 당일, 태조가 느닷없이 고향으로 가서 조상들의 묘를 참배하겠다며 바로 그 곳으로 떠났다. 그래서 이에 대해 태조가 조사의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는 추측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북면에 별다른 기반이 없었던 조사의가 무려 7,000명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뒷 배경이 없는 상태에서는 가능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태조는 마지막 힘을 모아 증오했던 아들 태종과 맞서려고 했던 것 같지만, 얼마 안가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다. 태조는 조사의의 난이 실패하자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쓸쓸히 환궁했다. 그리고 이후 그는 여전히 순행 길을 이어나갔지만, 이전처럼 돌발행동이나 발언은 일체 하지 않았으며, 아예 술과 고기를 끊고 불교에만 매진했다. 그리고 태조는 태종 8년 5월 24일,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아들 태종 이방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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