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5편
■이순신 5편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일부 대신들과 대간의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상당히 빠르고 순조롭게 승진했다. 1589년(선조 22년) 2월 이산해(李山海)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서게 된 이순신은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조방장(助防將)과 선전관(宣傳官) 등을 거쳐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1591년(선조 24년)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부임한 이순신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그의 나이 46세였고, 임진왜란을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무과에 급제한 지 15년 동안 한 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해 여러 곤경과 부침을 겪은 끝에 그는 수군의 주요 지휘관에 오른 것이다.
변방의 말직만을 전전하다가 삶을 마감했을 장수도 분명히 적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그의 역정은 수준 이상의 보상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눈앞에 다가왔지만 거의 대비하지 않고 있던 거대한 국난을 앞두고, 전쟁 직전 그가 북방의 말단 장교가 아니라 남해의 수군 지휘관이 되었다는 사실은 국가적으로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천행(天幸)이었다.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로 출항하면서 발발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조선의 국토와 민생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보름 여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5월 2일), 선조는 급히 몽진(蒙塵:난리를 피해 옮김)해 압록강변의 의주(義州)에 도착했다(6월 22일). 개전 두 달 만에 조선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까지 몰린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요청을 받아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玉浦)와 합포(合浦)에서 왜선 30여척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둔 것을 시작(옥포해전)으로 20여 회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했다. 그 승전들은 그야말로 패색(敗色)이 짙은 전황을 뒤바꾼 결정적인 계기였다.
왜란이 일어난 1년 뒤인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해군을 통솔하면서 공격과 방어, 집중과 분산의 작전을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나라는 전란에 휩싸였고 그는 국운을 책임진 해군의 수장으로서 엄청난 책임과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지만, 험난했던 그동안의 관직 생활에서 보면 최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기간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활약으로 조선 수군은 해상권을 장악했고, 북상하던 왜군은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和議)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호남지역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전쟁이 장기화될 것에 대비해 둔전(屯田)을 일구고 병사들을 조련하였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