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 7편
■ 이순신 7편
이순신은 우의정 정탁 등 일부 대신들의 끈질긴 구명운동에 힘입어 5월 16일에야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리석은 임금의 명령 하나로 죽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난 것이다. 백의종군 첫날 이순신은 죄인이라는 이유로 종의 집에서 자야 했다. 파직되어 죄인의 몸으로 백의종군 길에 나선 아들을 보러 여수에서 아산으로 오던 이순신의 노모는 결국 아들을 보지 못하고 운명했다. 죄인의 누명을 쓰고 어머니마저 잃은 이순신은 『해가 캄캄하게 보인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빨리 죽기만 기다릴 뿐이다.』 라고 탄식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면서 원균에게 넘겨준 수군의 전력은 대략 군함 300여척, 천자포 등 대포 300문, 군량미 9914석, 화약 4천근 정도였다. 그 수군이 1597년 7월15일 거제도 해역 칠천량에서 크게 패했다. 아니, 그냥 진 것이 아니라 궤멸(潰滅)됐다고 할 수 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다 죽고, 함대는 일본군의 수륙 합동작전 앞에 무참하게 박살나고 말았다. 경상 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빠져나온 12척의 배만이 격침의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 온 정열을 쏟아 부어 침략군의 대항세력으로 성장시킨 조선 수군, 무적함대가 7년 동안의 임진왜란 기간 동안 단 한번 처음 당한 이 참패로 사실상 궤멸되어 버렸다. 7월18일 패전 소식을 들은 날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정유. 맑음. 새벽에 이덕필이 변홍달과 함께 와서 전하기를 16일 수군이 밤 기습을 당해 통제사 원균을 비롯해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들과 많은 사람이 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다. 듣고 있으려니 통곡이 터져 나오는 것을 이길 길이 없다.』
이순신은 이때 복권(復權)된다. 수군 전멸에 경악한 선조가 경림부원군 김명원, 병조판서 이항복, 도원수 권율 등으로부터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하시라’는 제안을 받고 동의한 것이다. 선조는 이순신을 재임명한다는 교서를 내렸다. 이순신이 재임명 교서를 받았을 때의 정황은 어떠했을까? 조선 수군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수군 궤멸에 따라 지상군도 곳곳에서 그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수령들은 ‘적이 다시 침략해온다’는 막연한 정보만 갖고 무리하게 청야령(淸野令:적군이 아군의 시설물, 식량, 군수물자를 활용하지 못하도록 이것들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소개시키는 명령)을 발동하곤 했다. 피난민은 저마다 산간으로 숨어들어가고 성읍과 도시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이와 달리 일본군은 칠천량의 대승으로 조선 수군이 완전히 전멸한 것으로 판단하고, 지상전(地上戰) 중심의 호남 점령 전략을 추진했다. 일본군은 바다를 돌아 서해로 진출하는 대신 경상도 사천에 상륙해 서북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남원성을 점령하고 전주마저 점령했다. 임진왜란 이후 우리 수군의 제해권 장악으로 안전했던 호남은 갑작스러운 일본군의 진격과 학살, 약탈로 생지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 8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