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인좌의 난 5편
■ 이인좌의 난 5편
이인좌의 난은 그때까지 조정에서 노론과 힘겨루기를 해왔던 소론 당파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난을 획책한 것도 소론이고 난을 평정한 것도 소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소론 중신들은 숨을 죽이고 영조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당쟁이 국왕을 끌어내리려는 반란으로 비화하는 기막힌 현실을 목도한 영조는, 과거 숙종의 환국정치 형태로 붕당의 폐해를 조율하는 것보다는 조정에서 양자를 공평하게 대우하는 탕평책을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영조는 무신란의 원인을 폐쇄적 인사정책 때문으로 보고, 노론 강경파보다는 노·소 간의 조정과 병용(倂用)책을 주장한 노론 온건파 중심의 탕평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무신란은 곧 영조가 탕평책을 기반으로 정국 안정과 왕권 강화를 추진할 수 있는 명분으로 작용하였다.
1729년(영조 5년)부터 영조는 노·소론 인사들에게 골고루 관직을 배분함으로써 양측이 모두 벼슬길에 나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다는 분등설(分等說), 노·소론 중에 어느 한쪽을 벌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쪽의 죄를 찾아 함께 벌함으로써 공평성을 유지한다는 양치양해(兩治兩解), 노·소론 간에 서로를 견제할 수 있도록 관직을 배려하는 쌍거호대(雙擧互對) 등의 인사정책을 적용했다.
노론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다음 소론 이태좌를 좌의정을 임명했다. 또 이조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임명한 다음 참판에 소론 송인명, 참의에 소론 서종옥, 전랑에 노론 신만을 임명했다. 그렇듯 영조는 쌍거호대를 통해 노·소론을 망라한 연립정권을 구성함으로써 회심의 탕평정국을 실현시켰다. 이와 같은 영조의 조율에도 불구하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로 치달았다.
그 후에도 무신난의 잔여 세력인 박세만, 주노미, 권첨, 정사효 등이 남인 세력을 끌어들여 역모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피바람을 맞았고, 나주에 유배된 윤취상의 아들 윤지가 괘서를 돌린 나주괘서사건 등이 발생하면서 소론과 남인들이 재차 희생되었다. 그처럼 이인좌의 난은 영조 치세 내내 소론의 와해를 재촉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세자의 죽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영조의 혜안을 흐리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