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조반정 2편
■ 인조반정 2편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남인과 북인이 서로 정권을 잡기위해 대립하고 있었다. 북인 측 인물이었던 이이첨이 큰 활약을 펼치면서 류성룡을 비롯한 남인은 정계에서 실각하였고, 결국 북인 정권이 수립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후계문제를 놓고 북인이 스스로 분열하기 시작하는데, 광해군을 지지하던 계파를 대북이라 하고, 광해군을 반대하던 계파를 소북이라고 불렀다.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은 말 그대로 대북이 소북보다 세력이 컸기에 이름 붙여졌다.
소북은 대북에 비해 확실히 열세였지만, 유영경이라는 천재 정치가가 활약하면서 대북파와 세력 균형을 이루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유영경은 선조의 신임을 받아 마음껏 권세를 휘둘렀고, 이런 그를 지켜보던 대북의 이이첨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만을 기다리며 광해군의 입지를 다지는데 주력했다.
당시 광해군은 세자였기에 선조 사후에 그가 조선의 다음 임금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의 정통성이었다. 선조의 정식 부인 자식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장남도 아닌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세자책봉 과정은 정식 절차를 제대로 밟은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으로 인한 비상사태에서 일단 세자로 책봉된 일종의 땜빵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게다가 광해군의 정통성에 가장 약점이 되는 것은 바로 명나라가 광해군이 정식부인의 자식이 아닐 뿐더러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를 조선의 왕세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선조가 작정하고 세자교체를 명한다면 할 수도 있는 가장 큰 명분이 되는 요인이기도 하다. 물론 선조는 계속해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청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명나라의 세자책봉은 수차례 미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의인왕후가 사망하고 1602년 선조가 김제남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이니 이가 바로 인목왕후이다. 그리고 소북세력과 유영경은 그 즉시 김제남과 손을 잡았다. 당시 선조의 나이가 51세였으니 인목왕후가 아들을 출산하여 선조가 적장자를 볼 수 있다면 세자를 갈아치울 좋은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1606년 인목왕후가 아들 영창대군을 출산했기 때문이다. 물론 선조는 당장이라도 영창대군을 세자로 앉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국왕인 그가 그리 앞뒤 분간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당시 선조는 나이 50세를 넘기면서 슬슬 병으로 골골대기 시작했고, 이제 막 태어난 젖먹이를 세자로 앉혀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1607년 10월 9일 선조가 갑자기 쓰러졌다. 선조는 대외적으로 북방 여진족들이 통일 전쟁을 벌이는 등 상황이 뒤숭숭했기 때문에 세자를 함부로 바꿀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결국 삼정승을 불러다가 광해군에게 정식으로 양위할 듯을 밝혔다. 이때 영의정은 광해군 반대세력인 소북파의 유영경이었는데, 유영경은 이 소리를 듣고 놀라 애걸복걸하며 만류했다.
광해군이 즉위하면 자신의 목이 달아날 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조는 이미 마음을 굳혔고, 왕비인 인목왕후도 선조의 뜻에 따라 광해군에게 양위한다는 내용이 담긴 교서를 한글로 지어 내렸다. 그녀 역시 선조 못지않게 자신의 아들 영창대군을 세자로 앉히고 싶었겠지만, 그녀는 현실감각이 있었고 현명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