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8편
■인조반정 8편
인조는 반정에 성공해 왕위에 올랐으나 반정의 대의명분이나 정통성이 약했으므로 반정 세력인 서인들 의견에 휘둘리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중종반정 때보다 인조반정 당시 인조가 직접 앞장 서는 등 반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므로 중종에 비해 자기 목소리를 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인조는 자기 세력을 완벽히 장악한 수준의 쿠데타는 아니었다. 그러니 강력한 왕권을 세워 신료를 장악하거나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서인세력은 반정 이후 정국을 주도하고, 남인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여 인조의 왕권행사를 제약했다.
인조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러들인 왕으로 지탄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내치(內治)로는 폭군적 모습을 보인 것은 별로 없다. 실록에 나오는 인조는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을 정도로 조용한 왕이었다. 인조는 나름 신하들에게도 인정과 배려를 베풀 줄 알았고, 백성들의 안타까운 일을 듣게 되면 눈물을 뿌리며 진심으로 걱정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조 초창기 겉으로 드러난 인간성은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위기가 닥쳤을 때 진정한 인간성이 드러난다. 인조 또한 선조처럼 위기 시 국가 관리를 잘못한 것은 사실이다. 또, 그가 소현세자와 세자빈인 강빈에게 보인 행위는 냉혹한 인간 인조의 일면을 보여준다. 인조가 현재 가장 많은 욕을 먹고 비난을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쩌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 인조시대부터 성리학이 급격하게 교조(敎條)화되고 여성의 지위가 내려갔다. 인조와 서인정권은 병자호란으로 기존에 세웠던 집권 명분이 약해지고 삼전도의 굴욕으로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내부에서부터 정권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이에 기존에 상당히 느슨하게 적용되던 성리학적 종법(從法)질서를 극단적으로 강화해 내부의 불온한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덕분에 수많은 여성들이 열녀(烈女)라는 이름아래 목숨을 잃거나 평생을 외롭게 수절해야 했다.
인조는 재위 26년 동안 큰 전란을 두 번 거치면서 무능함과 비겁함의 극치를 보여주다가 1649년 5월 8일(음력) 이승을 떠났다. ‘인조(仁祖)’라는 묘호는 나라를 구해 종묘사직을 보존했다하여 아들 효종이 붙여준 것이다. 성리학에서 최고의 가치로 두는 덕목(德目)은 사랑하라는 인(仁)과 용서하라는 서(恕)이다.
글자 뜻으로만 보면 성군이자 명군에게나 주어질 법한 묘호이다. 그러므로 ‘인조(仁祖)’라는 명칭은 치적이 훌륭했던 문종(文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등의 묘호보다 한 단계 위의 명칭인데, 과연 그 이름에 걸맞는 업적을 남겼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인조 이후의 조선 임금들은 마지막 군주인 순종까지 모두 인조의 후손들이다. 다만 인조직계는 헌종, 철종에서 일단 끊겼고, 조선왕조의 사실상 마지막 왕 고종의 경우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후손이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장릉(長陵)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