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종과 김인후 2편
■ 인종과 김인후 2편
인종은 왕으로 있던 시절, 1543년 6월 김인후가 기묘년에 희생된 사림파들의 신원을 요청하자, 기묘사화로 희생된 사림파들의 명예 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조광조, 김정, 기준 등의 복직이 이뤄진 데는 김인후의 역할이 컸다. 8개월 만의 짧은 재위 기간을 마지막으로 인종이 승하한 후 대윤과 소윤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정쟁에 휘말리기를 꺼린 김인후는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다시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인종 승하 이후 왕위는 이복동생인 12세의 명종이 계승했고, 대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외척정치의 폐단은 심해졌다. 김인후는 명종 대에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성균관 전적, 공조정랑, 홍문관 교리, 성균관 직강 등에 제수됐으나 대부분 사직하고 성리학에 전념하면서 호남 지역에 성리학이 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548년에는 처향(妻鄕)인 순창의 점암촌으로 옮겨 초당을 세우고 훈몽재(訓蒙齋)라 이름 짓고, 제자를 양성했다. 1549년 10월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이어 당하자, 고향인 장성에서 여묘살이를 하며 예(禮)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인후는 짧은 관직 생활 동안 인종에게 큰 영향을 줬고, 남은 대부분의 생애는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사림파 학자로서 김인후의 위상을 다시 한 번 끌어올린 인물은 다름 아닌 정조이다. 정조는 김인후를 성균관 문묘에 배향하도록 했다. 이는 조선시대 학자에게는 최고의 영예였다. 1796년(정조20년) 김인후의 문묘 배향은 그만큼 김인후의 학자적 위상이 높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정조는 재위 기간 동안 소외된 지역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영남과 마찬가지로 조선 중기 이후 정치적으로 크게 부상하지 못했던 호남 지역을 끌어안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정조가 호남 끌어안기 상징으로 지목한 인물이 바로 김인후였다.
김인후는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으로서 조광조 등 선배 학자들의 성리학 이념이 본격적으로 구현되는 조선 사회를 희망했다. 학문적 능력은 탁월했으나, 안타깝게도 인종의 급서로 인해 현실 정치에서 이를 적극 실현시킬 수가 없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여 호남 지역에 성리학이 자리 잡아가도록 했던, 16세기 호남 사림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현재 장성에는 김인후를 배향한 필암(筆巖)서원이 있는데, 이곳은 호남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철폐 당시에도 필암서원은 그 무게와 중요성 때문인지 폐쇄되지 않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는 인종이 직접 내린 ‘어필묵죽도(御筆墨竹圖)’가 경장각에 보관돼 있어 인종과 김인후의 각별한 관계를 가늠할 수가 있다. 인종이 좀 더 오래 재위하면서 김인후와 함께 조선 왕조를 이끌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