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원정遠征에 동원된 고려
■ 일본 원정(遠征)에 동원된 고려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는 수많은 공녀·공물 뿐 아니라 군대 징발로도 시련을 겪었다.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에 동원된 것이다. 원 세조 쿠빌라이는 동북아 지역에서 유일하게 복속되지 않은 일본마저 정벌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측에서는 경유지인 고려에 끼칠 피해와 일본의 보복 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는 확답을 미룬 채 시간을 끌었다. 그러자 쿠빌라이의 열화 같은 책망이 뒤따랐다. 원은 무력 침략을 하려고 고려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그리고 곧 흑산도를 전진기지로 삼아 일본 정벌을 준비했다.
1274년 5월 14일, 몽고는 일본 정벌의 포문을 열었다. 그러나 고려의 원종이 갑자기 사망하여 출전이 석 달이나 연기되었고, 그 뒤를 이어 충렬왕이 즉위하였다. 충렬왕이 즉위하자 여·몽연합군은 쓰시마섬을 향했다. 쓰시마를 점령한 여몽연합군은 기세를 몰아 이키(壹岐) 섬을 거쳐 하카다(博多:후쿠오카)를 공격했다. 막강한 무기를 바탕으로 일본을 제압한 여·몽연합군의 승리가 눈앞에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태풍으로 좌군사 김신을 비롯하여 연합군 1만 4천여 명이 물귀신이 되어 버렸다. 일본은 이것을 신풍(神風:카미카재)이라고 불렀다.
1차 원정은 완전 실패였다. 그로부터 6년이 흘러 원은 고려의 합포(옛 마산시)에 정동행성(政東行省)을 설치하고, 충렬왕을 좌승상행중서성사로 정했다. 고려에서도 김방경(金方慶)을 총대장으로 삼아 1만 명을 거느리고 몽고군에 합세했다. 5월에 홍다구·김방경 등이 군함을 타고 합포를 떠나 일본의 규슈로 건너가 연합군과 일본군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여름이 되자 태풍은 또 다시 여·몽연합군을 덮쳤다. 원나라 15만 명의 병졸과 고려군 1만 명이 거의 다 태풍에 휩쓸려 수장되고, 살아남은 자는 겨우 1만9천 명이었다.
일본 원정의 대참패로 세계 통일을 이루고자 한 세조 쿠빌라이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전쟁 준비 때문에 고려 백성은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몽고가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한 1231년부터 고려 백성은 무려 50년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내는 비운의 세월을 겪었다.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원정에 실패한 쿠빌라이는 또 다시 일본 정벌을 계획했으나 국내 정세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반대 여론에 부딪혀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원나라는 이후에도 두 번 더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정벌준비를 강요하여 그 피해가 극심하였다. 1293년 충렬왕은 공주와 함께 동정(東征)의 불가함을 직접 호소하고자 원나라로 갔는데, 이듬해 원세조가 죽음으로써 동정(東征)은 끝이 났다. 일본 정벌을 위해 일시적으로 설치했던 정동행성은 그대로 두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게 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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