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인도 감동한 안중근의사 2편
■ 일본인도 감동한 안중근의사 2편
1910년 3월26일은 안중근의사의 사형이 집행되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안중근의사는 어머님이 보내주신 하얀 명주 한복으로 갈아입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고, 간수(看守) 치바 토시치는 부동자세로 그의 감방을 지키고 있었다. 치바는 일본군 헌병이면서 안중근을 감시하는 간수이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는 다른 일본인들처럼 일본인의 우상인 이토를 살해한 살해범인 안중근에 대해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안중근의사가 단순한 살해범이 아닌 진정한 동양의 평화를 생각하는 굳은 의지와 높은 인품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존경하며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사형 당일 날, 안중근은 치바 토시치에게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 위해서 몸을 바침은 군인의 당연한 본분이다)’라고 유묵(遺墨)을 써서 선사했다. 치바 토시치는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 센다이에서 철도원으로 일하면서 안중근의사의 위패와 안중근의사가 생을 마감하면서 선물한 그 유묵(遺墨)을 모셔놓고 평생 그의 명복을 빌어줬다고 한다. 그리고 1980년 이 유묵은 안중근의사 기념관에 기증되었다.
형장에 도착한 안중근은 검찰관, 변호인 등이 입회한 가운데 교수대의 계단을 올랐다. 교수대에 오른 안중근은 잠시 마지막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사형집행문의 낭독이 끝나고 집행부는 최후의 유언을 묻는다. ‘나의 이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오늘 임검한 일본 관헌들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의 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3월26일 오전 10시4분 예정대로 사형은 집행됐고, 10시15분에 안중근의사는 순국했다. 검시가 끝나고 안중근의 유해는 작은 통 속에 넣어져 여순감옥 묘지에 매장되었다. 형제들의 간곡한 탄원과 절규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의사의 유해는 유족에게 인도되지 못했다. 일제는 안중근의사의 유해가 한국인의 손에 넘어가면 분명 그의 묘소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이고, 이로 인해 많은 저항이 따를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거부한 것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중근의사의 유해는 정확한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달라는 유언을 아직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효창공원에 가면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만들어진 삼의사 묘가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무덤의 수는 4개인데 그 곳에 영면한 분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사 뿐이다. 왼쪽에 비석 없는 무덤이 바로 안중근 의사의 빈 무덤이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