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좌관심靜坐觀心 - 고요히 앉아 마음을 들여다보다.
정좌관심(靜坐觀心) - 고요히 앉아 마음을 들여다보다.
고요할 정(靑/8) 앉을 좌(土/4) 볼 관(見/18) 마음 심(心/0)
몸을 바르게 하여 조용히 앉은 채(靜坐) 마음의 본바탕을 살펴본다(觀心)는 말은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렵다. 눕지 않고 몇날며칠을 용맹 정진하는 선승들의 長坐不臥(장좌불와)나 오래 전 대작 드라마 ‘太祖 王建(태조 왕건)’에서 弓裔(궁예)의 관심법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瑜伽(유가)라고도 하는 심신단련법 요가(yoga)가 고대 인도에서 시작됐다고 하여 불교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자신을 되돌아보는 수양과 명상을 중시하여 선인들은 갖가지 좋은 말을 많이 남겼다.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악을 물리치고 선을 북돋는 修身(수신)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처음 ‘大學(대학)’에 나오듯이 먼저 마음의 수양도 언급한다. ‘머무름의 경지를 안 다음에야 자리를 잡고(知止而後有定/ 지지이후유정), 자리를 잡은 뒤에야 마음이 고요할 수 있으며(定而後能靜/ 정이후능정), 마음이 가라앉은 뒤에야 안정될 수 있고(靜而後能安/ 정이후능안), 안정된 뒤에야 깊이 생각할 수 있으며(安而後能慮/ 안이후능려), 사색한 뒤에야 능히 얻을 수 있다(慮而後能得/ 려이후능득).’ 그러면서 마음이 그렇지 못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視而不見 聽而不聞/ 시이불견 청이불문)’고도 했다.
비슷한 의미로 老子(노자)의 道德經(도덕경)에는 ‘만물이 근원으로 돌아가면 고요함을 찾는다(歸根曰靜/ 귀근왈정)’고 했고, 宋(송)의 程頤(정이, 頤는 턱 이)는 ‘마음이 고요해진 후에 만물을 보면 자연히 모두 봄의 생기를 가지게 된다(靜後見萬物 自然皆有春意/ 정후견만물 자연개유춘의)’고 近思錄(근사록)에서 말했다.
淸(청)의 蘭生(난생) 金纓(금영)이 엮은 격언집 格言聯璧(격언연벽)에는 더 와 닿는 명구가 있다. ‘고요히 앉은 연후에 평시의 성급함을 알 수 있다(靜坐然後 知平日之氣浮/ 정좌연후 지평일지기부)’, ‘고요함으로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고, 마음을 가라앉혀야 평시 말의 경솔함을 알 수 있다(守默然後 知平日之言躁/ 수묵연후 지평일지언조).’
우리나라는 사회의 어떤 분야든 급박하게 돌아가 생기가 넘친다. 외국인들은 ‘빨리빨리‘가 우리 국민성으로 여길 정도다. 가난에서 벗어나 경제부국으로 만들고 민주화도 이뤘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 개개인의 행복도는 모두 낮게 여긴다.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기만 옳고 남은 꺾어야만 하는 존재로 여긴다.
사회를 이끌어갈 정치를 비롯한 지도층은 더욱 시끄럽다. 고요함을 찾아야만 소란스런 속세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타인을 생각할 수 있다. 깨끗한 세계가 아니라도 고요히 앉아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