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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30일 토요일

정희왕후 윤씨 4편

■ 정희왕후 윤씨 4편

■ 정희왕후 윤씨 4편

윤씨는 세조와 함께 개인적으로 불교를 받들었지만, 정책적으로는 유교를 숭상한 조선의 국가이념대로 유교적 정치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불교의 화장하는 풍습을 없애고 도성 내의 염불소도 폐지했으며,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지했다. 그리고 6촌 이내에는 결혼을 금지하고 사대부와 평민의 제사에 차이를 두게 하였다.

하지만, 당시 정희왕후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것은 관리자로서의 역할이었고, 이 모든 정책의 시행은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중심이 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세력은 윤씨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점차 확대되어 막대한 정치와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고 특권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성장한 세력은 훈구파로 불리우고, 이들의 특권과 전횡을 비판하는 사림파와의 대결이 성종 이후 표면화되면서 연산군 때 사화(士禍)로 이어지게 된다.

7년의 세월이 흘러 성종은 20살의 청년이 되었다. 이제 윤씨의 섭정은 명분이 없어졌다. 어느 날 살인죄를 저지른 한 상인이 끌려왔는데, 이 상인은 예전에 세조를 도와 공을 세운 일이 있었다. 당시 세조는 고마운 마음에 “만약 자네가 앞으로 중죄를 지어 죽게 되었을 때 목숨을 살려주겠네“ 라고 약속했다. 상인은 당시 세조가 써준 문서를 내놓고 선처를 부탁했다. 세조의 어필을 본 윤씨는 살려주기로 했으나, 성종은 살인을 했으면 당연히 사형시키는 것이 법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마침 그즈음 윤씨의 섭정 중단을 요구하는 익명의 글이 저자에 나붙었다.

이 사건으로 결국 윤씨는 섭정을 거두게 된다. 윤씨가 섭정을 그만두겠다는 뜻을 성종에게 전하자, 성종은 더 보살펴 달라고 만류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처신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작 반대하고 나선 것은 한명회였다. 하지만 어른이 된 임금이 있음에도 계속 섭정을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다른 대신들이 들고 일어났다. 윤씨는 더 이상 명분이 없음을 알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고, 성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윤씨는 가끔 세조와의 추억이 어린 온양의 온궁을 찾아 휴식을 취하곤 했는데, 그로부터 7년 후 66살의 윤씨가 별세한 장소도 바로 온궁이었다. 윤씨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광릉에 안장되어 있다.

7년 동안의 과단성 있는 윤씨의 섭정은 성종 대에 조선의 여러 문물제도를 완성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정계의 최고 실력자로 국정을 운영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윤씨는 역대 왕비 중에서 그래도 행복한 일생을 보낸 여인이었고, 세종의 며느리 가운데 가장 정상적인 며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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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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