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안대군 1편
■ 제안대군 1편
세조 12년(1466년) 당시 세자이던 아버지 예종과 그의 후궁이던 소훈(昭訓) 한씨(안순왕후)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이름은 현(琄)이다. 소훈 한씨는 예종의 첫 번째 세자빈이던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한명회의 딸)가 인성대군 이분(李糞)을 낳고 산후병으로 죽은 뒤 입궐한 세자의 후궁이었으나, 아들을 낳았기에 빈(嬪)의 예로 대우받았다. 이복형인 인성대군이 세조 9년(1463년) 3세의 나이로 죽자, 예종 즉위년(1468년)에 원자(元子:제안군)로 책봉되었다. 4세 때 부왕(父王)인 예종이 죽음으로써 왕위계승 제1후보가 되었으나, 할머니인 정희왕후(세조의 비)가 아직 어리고 총명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왕위계승에서 밀려나고, 대신에 죽은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성종) 이혈이 예종을 이어 왕위에 즉위하였다. 정희왕후는 왕위계승에서 밀린 왕족 달리기의 일환으로 성종 1년(1470년)에 제안군을 제안대군(齊安大君)으로 봉했다.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그를 ‘성품이 어리석다’ 고도 하는 한편, ‘진실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몸을 보전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감춘 것’이라는 각기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종합해서 추론해 보면,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실세력과 훈신(勳臣)세력의 각축 속에서 희생된 인물이었고, 정치를 멀리하고 음악에 묻혀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안위(安危)를 보전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제안대군은 여자를 병적으로 싫어하고 멀리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결혼생활은 아주 특이하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자 시절부터 제안대군은 늘 말하기를 “여자는 더러워서 가까이 할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왕자가 된 제안대군은 10살이 되던 해에 김씨 부인과 혼인하여 궁을 나갔다. 그런데 15세가 되어 합방을 치러야 하는 데 부인과 마주 앉는 것조차 싫어했고, 김씨 부인을 미워했다. 당시 제안대군은 누군가의 부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의 부인은 언제나 죽을려나?” 라며 몹시 부러워했고, 결국 이혼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제안대군은 곧바로 박씨 부인과 재혼을 했는데, 억지로 재혼한 제안대군은 후처도 아주 미워했다. 재혼 후에는 또 다시 보는 사람마다 자신의 부인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런 사실로 보면 제안대군은 전처나 후처는 물론이고 여자 그 자체를 싫어하고, 관심이 없었던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럼에도 두 번이나 혼인을 한 것은 아마도 왕실 어른들의 성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일은 제안대군이 후처와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처와 재결합했다는 사실이다. 여자에 무관심한 제안대군이 전처를 사랑해서 재결합한 것은 물론 아니었을 것이다. 후처에 대한 무관심과 미움 때문이었다. 그처럼 여자를 싫어한 제안대군이 두 명의 부인을 거느리게 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상황임에 틀림없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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