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의녀 장덕 1편
■ 제주 의녀 장덕 1편
조선시대 의녀(醫女)로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은 당연히 ‘장금’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장금이 관비로 제주에 내려갔을 때 제주출신 의녀 장덕과 인연을 맺은 뒤 그녀로부터 여러 가르침을 받는다는 내용이 나왔었다. 이 때문에 장덕의 존재와 그 능력이 널리 알려지기는 했으나, 장금이 장덕과 인연을 맺고 의술을 전수받았다는 것은 드라마적인 재미를 위한 허구로 보여 진다. 장덕은 세종 말엽에 궁궐에 들어가 성종 19년(1488년)경 까지 활동하였고, 장금은 중종 10년(1515년)이후에 활동했던 것으로 보아 두 의녀가 만나기에는 시간적 한계가 있다.
세종 이후 의녀제도가 체계화되면서 의술의 정밀도에 따라 초학의(初學醫)·간병의(看病醫)·내의(內醫)의 3등급으로 분류됐고, 침의녀(鍼醫女)·맥의녀(脈醫女)·약의녀(藥醫女)와 같은 직능상의 분화도 이루어졌다. 더욱이 의서를 배우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의녀들에게 문자 교육을 강화하고, 의료전문인으로 양성하기 위해 의학교육도 심화했다. 그 내용은 실용적이고 쉽게 익혀서 사용 가능한 임상지식과 산부인과에 중점을 둬 이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녀의 의학교육은 독자적 전문 의료인이라기보다는 유교사회의 특성상 필요에 의해 남성 의사의 보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천민 신분으로 의료뿐 아니라 수사관, 검시관, 기생 등 다양한 분야에서 멀티엔터테이너로 활약했어야 했다.
전통적으로 제주 의녀는 전국의 다른 곳에 비해 치과·안과·이비인후과의 치료에 뛰어났던 것 같다. 당시 지금의 중국 상하이, 일본의 후쿠오카, 그리고 우리나라의 제주도 사이에 삼각무역이 이뤄졌던 것을 감안하면, 제주도에는 이미 치아를 치료하는 기술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리하여 장덕은 제주에서 전통적으로 전수되어 오던 의술을 도제(徒弟)식으로 철저히 전수받아 치충 제거에 탁월했던 한편, 코와 눈 등의 부스럼을 제거하는 의술에도 뛰어났던 의녀이다. 그녀는 주로 치과 관련 의술을 궁궐에서 펼치던 중 성종 19년(1488년) 경에 세상을 떠났다. 장덕 사후 중앙정부에서 그녀의 부재에 대해 대책을 강구할 정도로 존재감이 큰 여의였다. 치통을 앓아오던 성종은 장덕의 의술에 비견할만한 의료 능력을 가진 의사가 없다며, 이·눈·귀의 아픈 곳에서 벌레를 잘 제거하는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알리라는 내용의 문건을 속달로 제주목사에게 보냈을 정도이다.
이륙의 《청파극담》에 의하면, 장덕은 제주의 여비(女婢)였고, 가씨로부터 의술을 배웠다고 한다. 가씨는 치충(齒虫), 곧 치아의 벌레를 제거하는 의술에 탁월했던 제주의 여의사였다. 그런 만큼 장덕도 치통 치료에 뛰어났던 것이다. 장덕이 치과 관련 의술에 탁월했음은 그녀가 국왕의 치통 때문에 대궐로 들어가게 됐다는 ‘청파극담’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장덕이 대궐에서 행한 치료가 효험이 있었다는 사실도 나온다. 그녀는 혜민서(惠民署) 소속의 여의(女醫)가 됨으로써 제주출신 첫 국가공인 의녀가 되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