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4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4편
현량과가 실시됨으로써 참신 발랄한 30대 소장학자들이 기용되었고, 신진사류들이 한꺼번에 정계에 참여했다. 이들은 사림세력으로 뭉쳐 훈구파의 기득권에 맞섰다. 추천제 시험인 현량과를 통해 신진인사를 대거 영입해 개혁의 지원군으로 삼았다. 현량과는 조광조 세력의 확대를 가져왔다고 얘기할 수 있다. 조광조의 개혁정책은 백성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에는 커다란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다.
또한, 경연 활성화를 통해 왕이 끊임없이 성리학 이념을 교육받게 했다. 도교 제천행사를 주관하던 관청 ‘소격서’를 폐지함으로써 성리학이 아닌 이단 사상이 보급될 수 있는 길을 차단했으며, ‘소학(小學)’ 보급, 향약(鄕約) 실시를 통해 성리학 이념을 지방 구석구석까지 전파했다. 조광조는 중종이 경연에 지쳐 조금 쉬자고 하면 그 자리에서 "모범을 보여야 할 국왕이 그러시면 안된다" 고 면박을 주곤 했다. 또 경연 도중 중종이 하품을 하면 "국왕이 품행이 그러시면 안된다" 하고 조광조가 질문을 해서 중종이 잘 모른다고 하면 "그것도 모르시냐" 면서 중종을 면전에서 비난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조광조는 중종의 자기에 대한 애정을 철저히 과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중종은 조광조에 대한 사랑이 넘쳐 있을 때는 조광조의 이런 대범함(?)을 멋지게 보고 웃어 넘겼다. 그러나 조광조가 너무 태연한 모습으로 신하들 앞에서 그러한 모습을 자주 보이자 중종은 조광조가 자기를 인간적으로 능멸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종의 조광조에 대한 믿음은 점점 변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이제 증오로 넘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눈치없는 원칙주의자 조광조는 그런 행동과 개혁정책을 중종에게 계속 밀어부치니 중종은 조광조에 이제 인간적으로 진절머리를 내기 시작했다.
중종은 조광조와 신진사류가 반정공신들을 적당히 견제 해주기를 바랬을 뿐인데, 아예 자기 머리 꼭대기 위에서 논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조광조와 신진사류가 훈구파보다 더 지나치게 신권을 강화시키고 왕권을 제약한다고도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조광조를 궁지에 몰아넣게 된 것이 위훈삭제(僞勳削除)다.
조광조와 신진사류는 공신(功臣)이 너무 많아 국가 재정을 축내고 있다면서, 실천 대안으로 반정공신 2·3등 중 가장 심한 것은 개정해야 하고, 4등 50여 인은 모두 공이 없이 녹을 함부로 먹고 있으므로 삭제함이 좋을 것이라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이는 중종반정 때 거짓 공훈을 내세워 공신이 된 이들을 골라 공신명단에서 삭제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반정공신들은 기득권이 되어 있었고, 현실적으로 원로가 된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급격한 개혁주장은 씨가 먹힐 리가 없었다. 그리고 중종도 위훈삭제만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