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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1일 목요일

조선 남성들의 패션아이템, 갓

■ 조선 남성들의 패션아이템, 갓

■ 조선 남성들의 패션아이템,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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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일상적인 삶을 빼앗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외치고 있을때,, 패션업계에서 내놓은 ‘사회적 거리두기’ 아이템으로 챙이 1m에 이르는 큰 갓을 쓴 모델들의 사진이 등장하기도 했었다. ‘K-갓’이다. 한류의 영향으로 지구 반대편 국가에 우리나라의 드라마와 사극이 소개되면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특히 최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킹덤이 인기를 끌면서 갓을 처음 본 외국인들이 원더풀을 외치며 ‘한국모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갓은 언제부터 쓰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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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나 신라 금령총 출토 유물 등을 볼 때, 우리나라에선 삼국시대부터 갓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를 거치면서 모양이나 재료가 달라지거나 변화를 거치면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우리가 사극에서 흔히 보는 검은 갓의 형태가 정착되게 되었다. 머리를 덮는 부분을 모자(帽子), 햇볕을 가리고 비바람을 피하기 위한 차양 부분을 양태(凉太)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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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 6년인 1357년에 문무백관(文武百官)에게 갓을 쓰도록 해서 갓이 신분이나 관직을 나타내는 사회적 표시가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 초에는 궁궐에 출입하는 관리는 모두 갓을 쓰고 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앉은 임금이 신하들을 내려다보면 아마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모자만 보였을 듯하다. 1417년 12월 20일 태종은 "조로(朝路·여러 신하가 조회를 위해 오가던 길)에 비나 눈이 오는 날이 아닌데도 모든 관리가 갓을 쓰고 있어 불편하다"고 심기를 토로했다. 그래서 다음해부터 조정에서는 사모(紗帽)만 쓰게 했는데, 모자만 있고 차양이 없는 요즘 전통혼례에서 신랑이 쓰는 모자의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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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갓은 궁궐 밖 일상생활에서 양반 남성들이 쓰는 조선의 모자가 되었다. 우선 머리털을 정수리 위로 끌어올려 상투를 튼 다음, 앞 머리카락을 걷어 올려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그물 모양의 망건을 두르고, 다시 속 모자인 탕건을 쓴다. 집 안에선 이 ‘탕건’ 상태로 있다가 외출할 때는 그 위에 갓을 쓰고 나가게 된다. 조선왕조 500년 내내 갓 모양은 다 똑같았을까? 그렇지 않다. 15세기 성종 때만 해도 모자 부분이 둥글어 스님 모자 같다는 말이 나왔다. 연산군 때 이 부분에 모서리가 생겼고, 중종 말기에 이르면 영국 신사들이 쓰는 모자처럼 높이가 높아졌다가 명종 때엔 모자 부분이 다시 낮아지고 차양 부분인 ‘양태’가 넓어졌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변화를 겪은 뒤 순조 말기엔 양 어깨를 완전히 덮을 만큼 양태가 넓어졌는데,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개혁 정책의 하나로 갓 폭을 줄이도록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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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년) 상투를 자르도록 하는 단발령(斷髮令)과 함께 갓은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갓은 상투를 튼 머리에 최적화된 모자였기 때문에, 새로운 서양식 헤어스타일에는 아무래도 신식 모자가 어울렸던 것이다. 갓의 재료는 말의 갈기나 꼬리털인 말총이었다. 고려 말에 말을 키우는 목장이 늘어나면서 가볍고 질긴 말총이 갓의 표준 재료가 되었던 것이다. 질 좋은 말총으로 제대로 만들어진 갓은 매우 가볍고 얼굴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워 선비의 기품을 드러날 수 있게 하는 조선시대 남성들의 패션 아이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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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