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7편
■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7편
승조원의 수는 아타케부네(노꾼 90명, 전투원 200명)가 판옥선(노꾼 110명, 전투원 50명)보다 많았다. 일본의 수군 병졸은 조총·활은 물론 칼과 창을 지닌 보병이므로 많은 전투원이 필요했다. 반면 조선 수군의 병졸은 화포를 운용하는 포병에 가까웠다. 일본 수군이 판옥선에 접근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난관이 있었다. 통상 판옥선의 선체 높이는 세키부네보다 높았다. 일본 수군이 백병전을 하려면 사다리를 타고 배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조선 수군은 높은 갑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당대 일본의 주력 함선이었던 세키부네(関船)나 코바야부네(小早船)는 판옥선보다 크기가 작고, 높이도 상당히 낮아서 도선(渡船)하려면 성을 공격하듯이 판옥선의 병사들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쏘는 화살, 포 등을 피하고 버티며 승선해야 했다. 설사 승선에 성공하더라도 이미 등반을 통해 체력이 소진된 채로 무장한 조선 군졸들과 싸워야 했으므로 승산이 없었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군선의 강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이를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전술을 계획하고 구현해 냈던 것이다. 판옥선 같은 평저선(平底船)은 느리지만 안정감이 있어 파도에 강하고 선회력이 좋았다. 무려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했다. 반면 일본군의 주 전함들은 첨저선으로 회전하기 위한 반경이 커서 한참을 돌아야만 회전이 가능했다. 그래서 울돌목 같은 파도나 물살이 강한 곳에서, 왜군은 무리한 선회를 하려다가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물살이 빠른 곳을 주로 활용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런 평저선의 선회력을 이용하면, 한쪽에서는 함포발사를 할 수 있고, 다른 쪽에서는 장전을 하는 식으로 해서 상대방보다 훨씬 포를 빠르게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선보인 학익진과 같은 진형을 구축하는 것도 360도 제자리 회전이 가능한 판옥선이 아니라면 매우 어려운 전술이었다.
해전에서는 사실상 전함의 선회력이 전투력에서 가장 큰 비중을 담당한다. 왜냐하면 당시의 전함은 좌우 측면에 함포를 달고 있기에 함포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함이 측면에 위치해야한다. 즉, 아무리 함포를 많이 달고있는 전함이라해도 적군이 측면이 아닌 앞이나 뒤에 위치한다면 함포 공격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침몰하는 수도 있다.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하여 곧바로 함포 공격을 할 수 있는 판옥선과 회전하기 위해 많은 공간이 필요한 왜선들과의 전투는 절대적으로 조선이 유리한 싸움이었다. 또한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해 배 위에서 대포를 쏠 때 반동 흡수에 유리하여 명중률이 높았다. 반면 왜군의 전함들은 첨저선이라 흔들림이 심해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이처럼 판옥선의 전투력은 군사나 화포의 숫자보다는 바로 평저선이라는 구조 자체에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백전백승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명량대첩에서 판옥선 12척으로 (게다가 전투 초반에는 대장선 혼자서) 적선 133척과 싸워 대승을 거둔 전설적인 승리가 가능한 이유도 이러한 전함 간 구조적 차이에 있다.
단, 판옥선의 단점은 이동 속도가 느린 것이었다. 이순신장군은 판옥선의 단점을 보완해 거북선을 만들어 돌격선으로 삼았다. 속도가 빠른 거북선을 먼저 돌진시켜 적의 대열을 흩뜨린 다음, 판옥선에서 화포 공격을 퍼부어 장대한 승리를 끌어냈던 것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