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국정농단 사건 2편
■ 조선시대 국정농단 사건 2편
원래 조두대는 광평대군의 여종이었다. 8대군으로 알려진 세종의 아들 중에서 광평대군은 다섯째였다. 세종 7년(1425)에 태어난 광평대군은 12세 되던 해에 신자수의 딸과 혼인해 출궁했다. 그 직후 세종은 광평대군을 무안군 이방번의 후사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했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부왕 태종에게 살해당한 무안군의 혼령을 위로하고, 나아가 그의 미망인 왕씨를 봉양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부인 신씨와 함께 양모 왕씨를 모시고 살던 광평대군은 20세가 되던 해 7월에 첫째 아들을 보았지만, 그해 12월 창진(瘡疹:홍역)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충격을 받은 부인 신씨는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핏덩이를 남기고 저승으로 떠난 아들, 그리고 핏덩이를 남기고 출가(出家)해버린 며느리를 보면서 세종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 마음을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세종은 손자를 돌봐야 했다. 기록에 의하면, 핏덩이 손자를 불쌍히 여긴 세종은 유모에게 명하여 안고 앞으로 나오게 한 후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뜻으로 친히 수복(壽福)이라는 자(字)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 손자가 훗날의 영순군(永順君)이었다. 핏덩이 때부터 영순군을 돌보며 키운 사람은 친모(親母)가 아니라 유모와 몸종이었다. 영순군의 유모는 홍씨라는 여성이었고, 몸종은 조두대였다. 조두대는 세종 때 영순군을 시중들기 위해 처음 입궁했는데, 이후 영순군이 장성하여 출궁한 뒤에도 궁중에 계속 남아 궁녀가 되었다. 한문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영리했기 때문이었다. 세조는 그 어느 국왕보다도 조두대를 신임하고 중용(重用)했다. 부왕 세종의 유언 때문이었다. 세조는 조카 영순군을 친아들처럼 애지중지했고, 더불어 핏덩이 영순군을 길러준 조두대를 신임하고 중용했던 것이다. 이런 인연을 중시한 정희대비는 세조 사후에 조두대를 더더욱 신임하여 국가 권력구조의 정점에 올려놓기까지 했던 것이다. 한문을 모르기에 어쩔 수 없이 중용했다는 면도 있지만, 누구보다 신임하고 있었던 마음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정희대비의 수렴청정 기간 중 조두대의 공식 직함은 ‘전언(典言)’이었다. ‘정희대비의 말씀을 관장하는 궁녀’라는 뜻으로 환관으로 치면 승전색(承傳色)에 해당했다. 전언 조대두는 한문뿐만 아니라 정치 감각도 뛰어났다. 실록에 의하면 조두대는 재상 이철견의 수양녀였다. 이철견은 정희대비의 조카 즉 정희대비의 여동생 아들이었다. 이런 이철견의 수양녀인 조두대는 정희대비에게 손녀나 마찬가지의 존재였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