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국정농단 사건 3편
■ 조선시대 국정농단 사건 3편
조두대는 정희대비는 물론 인수대비(의경세자의 부인이자 성종의 어머니)와도 깊은 신뢰가 있었다. 인수대비의 대표작인 <내훈(內訓)>의 발문(跋文)을 조두대가 썼다. “(…) 신(臣)이 가만히 살펴보니 역대의 어진 왕비는 시부모를 부지런히 섬겨 인효(仁孝)의 덕을 다했고, 자식을 엄히 키워 국가의 경사를 이룬 자가 많았지만, 직접 교훈서를 지어 훈계한 자는 거의 없었습니다.(…)”는 내용으로 볼 때, 조두대는 분명 역사(歷史)와 고사(古事)에 두루 능통했다.
수렴청정을 하는 정희대비의 말씀을 관장하는 궁녀일 뿐만 아니라, 국왕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전언(典言) 조두대의 영향력은 실로 상상하고도 남을 만했다. 당연히 조두대의 영향력에 빌붙으려는 자들이 줄을 섰다. 이러한 비선실세를 이용해서 절대 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내알(內謁)이었다. 말 그대로 안에서 은밀하게 자행되는 알현과 청탁이 내알(內謁)이다. 한마디로 ‘조선판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이라고 할 수 있다.
조두대는 자신의 내알, 나아가 그 내알에 빌붙으려는 자들을 이용해서 거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물론 자신은 궁중에 있었으므로 직접 나서지 않고, 대신 조카 조복중(曹福重)을 내세웠다. 천민 신분의 조복중은 고모인 조두대를 배경으로 국내외의 각종 이권에 개입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조두대는 큰돈을 시주해 영감암(靈鑑庵)을 중창하기도 했다. 영감암은 오대산 상원사 주변에 있는 암자로 고려 말에 나옹대사가 수도하기도 했지만 조선 건국 후 퇴락했다. 세조 12년(1466) 국왕의 상원사 행차에 동행했던 조두대는 영감암의 사연을 듣고 중창하기로 결심했다. 본인의 입신양명과 부모의 극락왕생 그리고 세조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중창공사는 세조 13년 봄부터 예종 1년 가을까지 2년 반이나 걸린 대공사였다. 성종 5년(1474)에는 암자에서 수도하는 스님들의 생활을 위해 논 10섬지기를 시주했는데, 대략 1만 6천 평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렇게 정희대비의 수렴청정과 더불어 조두대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온갖 구설이 난무했다. 궁중 비화(祕話)에는 거의 빠짐없이 조두대가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종 6년(1475년) 11월 익명서 사건이 발생했다. 조정중신들이 작당하여 역모를 도모한다는 내용의 괴문서가 승정원 문에 붙었던 것이다. 익명서는 묻지 않고 바로 소각하는 것이 당시 관행이었지만, 이미 소문이 널리 퍼졌고 이름이 거론된 조정중신들은 사퇴의사를 밝혔다. 성종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큰 상을 내걸어 주모자를 색출하려 했다. 만약 주모자가 자수하면 면죄해주고, 모의에 참여한 자가 고발하면, 천인이면 면천하고 양인이면 3품 관직을 내리고, 주모자를 체포 또는 고발하는 자도 같은 상을 내린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