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국정농단 사건 4편
■ 조선시대 국정농단 사건 4편
12월 10일, 승정원에 ‘권즙’이라는 사람의 고발장이 접수되었다. 최개지라는 사람이 누군가와 노비 소송을 벌였는데, 그 누군가가 정희대비의 친정식구와 조두대에게 뇌물을 써서 이겼고 분개한 최개지가 괴문서를 붙였다는 내용이었다. 권즙은 이런 내용을 친척인 박윤형으로부터 들었는데 박윤형은 최개지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했다.
이 고발장은 익명서 사건을 궁중 문제로 비화시켰다. 성종은 익명서에 거론된 조정중신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주모자를 색출하려 한 것인데 고발장의 내용은 엉뚱하게도 정희대비를 겨냥하였다. 정희대비의 친정과 측근 조두대가 뇌물을 받고 노비 소송을 왜곡 했다면 그것은 곧 그들이 내알을 통해 국정을 농단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익명서 사건은 주모자 색출에서 정희대비와 관련된 언급을 최초로 발설한 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사건으로 비화했다.
의금부에서는 처음에 박윤형과 최개지를 체포하여 사실여부를 조사하였다. 하지만 박윤형은 그런 말을 권즙에게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고, 최개지 역시 그런 말을 박윤형에게 한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도리어 최개지는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박윤형이었다고 주장했다. 최개지와 박윤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희대비와 관련된 언급을 최초로 발설한 자는 권즙이었고, 그 말을 들은 박윤형이 최개지에게 전달했다는 추정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권즙은 자신의 죄를 박윤형과 최개지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먼저 고발장을 제출했다는 추정도 가능했다. 이렇게 되자 의금부는 다시 권즙을 체포해 조사했지만 그는 물론 사실무근이라 주장했다. 결국 정희대비와 관련된 언급을 최초로 한 자가 누군지는 오리무중이 되었고, 도리어 그 발언의 진위여부가 논란으로 떠올랐다. 조사가 진행되고 논란이 거세질수록 곤란해진 사람은 오히려 정희대비였다. 궁지에 몰린 정희대비는 12월 13일 승정원에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 수렴청정을 그만두겠다는 내용의 명령서를 내렸다.
정희대비 성종과 조정중신들은 만류했지만 정희대비의 강경한 고집으로 결국 수렴청정은 거두어졌다. 진실이 무엇이든 정희대비가 수렴청정을 시행하면서 조두대를 측근으로 두는 한 이런 논란은 사라질 수 없었다. 그런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조두대를 물리치든가 아니면 수렴청정을 그만두든가 둘 중 하나였다. 정희대비는 조두대를 내치는 대신 자신의 수렴청정을 포기했던 것이다. 성종 7년(1476년) 1월 13일이었다. 이렇게 정희대비의 수렴청정 7년은 불명예스럽게 막을 내렸다. 권력의 속성상 그 맛을 본 사람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려놓기는 어렵다. 그런데 정희대비는 자발적으로 불명예 퇴진을 택했다. 성종에 대한 믿음도 믿음이지만 조두대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