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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2일 금요일

조선시대에도 이혼을 할 수 있었을까 1편

■ 조선시대에도 이혼을 할 수 있었을까 1편

■ 조선시대에도 이혼을 할 수 있었을까 1편

조선시대에는 혼인과 마찬가지로 이혼도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칠거지악(七去之惡)’

이것은 아내에게 일곱 가지에 해당하는 잘못이 있을 때 아내를 쫓아낼 수 있다는 것으로, 시부모를 잘 모시지 못한다거나, 아들을 낳지 못한다거나, 음란하여 낳은 자식에 대한 혈통의 순수성을 보장할 수 없을 때, 질투가 심하여 처첩을 두기 어려울 때, 나쁜 병이 있어 건강한 아들을 낳을 수 없을 때, 말이 많아 대가족제도를 잘 운영할 수 없을 때, 도둑질을 했을 때 등이다.

그런데, 이 ‘칠거(七去)’는 매우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의 불효를 말하는가, 어느 정도의 병이 있을 때를 말 하는가 등 자의적인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며느리를 쫓아내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떤 식으로든 걸고 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둔 것이 ‘삼불거(三不去)’ 였다. ‘삼불거’ 란 아내가 쫓겨나서 갈 곳이 없다거나, 부모의 3년상을 같이 치렀다거나, 가난할 때 시집와서 부를 이루었다거나 할 때는 ‘칠거’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어도 아내를 내쫓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삼불거’ 에도 불구하고 나쁜 병에 걸렸거나 간통을 했거나, 부모에게 불효를 한 경우에는 구제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혼은 거의 허락되지 않았다. 남편이 죽어도 정절을 지키며 재혼이 금지되어 있는 사회에서 이혼녀가 많아지는 것은 사회 문제가 되기 때문에 국가가 최대한 이혼을 억제했기 때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금지되었다.

고종 때는 ‘칠거(七去)’ 중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과 질투가 제외되어 ‘오거(五去)가 되었고, ’삼불거(三不去)‘ 외에 자식이 있으면 무조건 이혼할 수 없게 하여 ’사불거(四不去)가 되었다.

남편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이혼을 하고 싶은 경우, 확실하게 이혼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 ‘아내의 간음’이었다. 실제로 아내가 결혼 전에 과거가 있었다고 무고하여 쫓아내기도 하였다. 또 다른 방법은 ‘소박’이라 하여 형식적으로는 부부로 살지만 실제로는 남남처럼 사는 것이다. 그리고 축첩이 가능한 것을 이용해 다른 여자를 첩으로 들이기도 했다.

서민의 경우는 양반보다 이혼이 쉬웠다. 부득이한 사유가 있을 때 부부가 서로 사정을 말하고 이혼을 하는 ‘사정파의(事情罷議)’, 칼로 웃옷 자락을 베어 그 조각을 상대방에게 주어 이혼의 증표로 삼은 ‘할급휴서(割給休書)’ 등의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민의 경우이고, 사대부가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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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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