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과학수사대 ‘오작인’
■ 조선의 과학수사대 ‘오작인’
조선시대에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고을의 수령(사또)이 수사와 재판을 총괄하게 되지만, 시신을 직접 검시 하지는 않았다. 변사체를 만지는 것은 매우 험하고 천시되는 일이었고, 시체의 상흔(傷痕)을 판독하는 전문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검시(檢屍)는 ‘오작인’이라 불리는 전문가가 하였다. 오늘날의 과학수사대인 것이다. 오작인은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寃錄)에 근거해서 사인(死因)을 찾았다. ‘무원록’은 중국 원나라 시대의 책이지만, 조선의 실정에 맞게 개정(改正)과 증보(增補)를 거듭하여,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검시와 문서 작성법을 정리한 검고(檢考)가 간행되기도 했다.
검시는 기본 두 번이고, 세 번 하기도 했다. 부족하거나 의심스런 점이 있을 때는 이미 매장한 시신을 파내서 다시 검시하는 굴검(掘檢)을 하기도 했다. 검시 때마다 각각 다른 관료와 오작인이 함께 진행해서 객관성을 확보했다. 변사체라도 시신을 훼손하고 칼을 대는 일은 금기시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부검(剖檢)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작인은 변사체의 상태나 상흔을 꼼꼼히 관찰하고, 사인을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법물(法物:조사도구)도 이용했다.
법물은 10여 가지였다. 식초는 흉기에 뿌려 핏자국을 찾는 데 썼고, 술지게미로 상처 부위를 닦아 상흔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은비녀를 항문이나 입에 넣어 색이 변하는지 살피고, 흰 종이를 눈 코 입에 붙여 독기가 묻어나오는지를 보며 독살 여부를 가렸다. 단목탕(檀木湯:향나무 끓인 물)은 시신을 닦는 용도이고, 삽주(국화과 풀) 뿌리는 태워서 악취를 없애는 데 쓰였다.
검시는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04년 5월 경상도 문경에 살던 양반 안재찬은 아내 황씨가 목을 매 자살했다고 관아에 신고했다. 오작인 김일남이 문경군수와 검시를 했다. 시체는 은비녀를 입에 넣었을 때 색이 변하지는 않았으나 곳곳에 구타한 상흔이 뚜렷했다. 또 뒷목에 끈으로 조른 흔적이 있었다. 검시 결과를 토대로 황씨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교살(絞殺)로 판명났다.
사건의 내막은 이랬다. 같은 마을에 살던 천민 정이문이 황씨를 겁탈하려다가 도주했다. 남편 안재찬은 정이문을 놓치자 대신 정이문의 할아버지를 잡아 고문하여 황씨와 정이문이 오랫동안 내연관계였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에 안재찬은 격분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아내를 구타하고 올가미로 목을 졸라 살해했던 것이다.
오작인은 연고가 없는 시신을 처리하는 일도 했기 때문에 훼손된 시체가 나오면 오작인이 잘라 팔았다는 낭설이 돌기도 했다. 오작인은 변사체를 만진다는 이유로 매우 천시받았지만, 그들 덕분에 말을 할 수 없는 시체는 억울함을 씻을 수 있었고, 오늘날과 같은 과학수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