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별별 직업 1편
■조선의 별별 직업 1편
1. 월천군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강과 개울(시내)도 흔하다. 큰 강은 뱃사공이 노를 젓는 나룻배를 타고 건넜고, 작은 강이나 개울은 다리를 놓아 건너 다녔다. 더 작고 얕은 개울(시내)은 징검다리를 놓아 건너다니면 된다. 하지만, 다리나 징검다리가 없거나 있어도 건너다가 발을 헛디디거나 이끼에 미끄러지면 물에 빠져 낭패를 보게 된다. 특히 양반가의 여인들은 남 보는 데서 신을 벗고 맨발을 드러낼 수 없었고, 양반 남성들 역시 체면 때문에 신 벗기를 주저했다.
이런 사람들을 등에 업고 시내를 건네준 뒤 돈을 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월천(越川)군’이라 했다. 월천군은 평소에는 다른 생업에 종사하다가 여름철 시내의 물이 불어 물살이 거세졌을 때나 얼음이 단단하게 얼기 전, 또 얼음이 녹기 시작할 때 일을 했다. 월천군은 발이 깨질 듯한 얼음물에 견디기 위해 물이 새지 않고 어깨까지 오는 가죽바지를 만들어 입기도 했다. 월천군과 함께 물에 빠지는 일도 적지 않았다.
2. 조화 만드는 사람 ‘화장(花匠)’
보존기간이 짧은 꽃을 원하는 대로 장식하고 오래 보기 위해 만드는 것이 조화(造花)다. 요즘은 조화(造花)를 하도 잘 만들어서 생화(生花)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지만, 싼 티가 나 보인다는 편견 탓인지 생화를 더 선호한다. 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생화를 장식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을 오히려 찾기가 힘들다. 왕비와 궁녀의 머리장식인 잠화(簪花), 장원급제자의 사모에 꽂는 어사화(御賜花), 각종 궁중행사의 장식 등이 모두 조화였다. 지금처럼 사시사철 생화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원예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조화의 종류도 국화, 모란, 장미, 복분자꽃, 연꽃 등 다양했으며 비단과 종이, 밀랍 등을 이용해 만들었다. 행사에 쓰인 물품과 비용을 기록한 의궤를 보면 한 차례 연회에서 사용되는 조화의 수는 보통 수천 개에 달했으며, 화환의 크기가 9척 5촌(약 3m)인 것도 있었다. 당시 조화의 개당 가격은 종류에 따라 6전에서 20냥까지 갔다. 쌀 한 가마니가 두세 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고가(高價)이다. 이 조화를 만드는 사람이 전문기술자인 화장(花匠)이다. 화장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있다. 관청에 소속되어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소집되어 조화를 만들었다. 왕실 연회에 쓰이는 조화의 종류와 수량은 갈수록 늘어났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기술자가 대개 그랬듯이 화장도 고된 노동을 했지만 대접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 국가 소속이더라도 행사가 없으면 월급은 한 푼도 나오지 않았다. 화장은 속장(俗匠:속된 장인)이라며 무시당했지만, 이들의 정교한 작업은 전문가가 아니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