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별별 직업 5편
■ 조선의 별별 직업 5편
1. 프로 바둑기사 ‘기객’
삼국시대부터 사랑받던 바둑은 조선후기에 이르면 온 가족이 즐기는 놀이가 되었다. 영조 때 ‘김석신’이라는 사람은 내기 바둑에서 딴 돈으로 생활했다. 그러나 내기만으로 생계를 꾸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세력가의 후원을 받아 생계 걱정을 덜고 오직 기량을 갈고닦는 데 몰입할 수 있었다. 후원자가 있는 일종의 프로 바둑기사는 ‘기객’이라 하고,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국수’라 했다.
2. 전업 가수 ‘가객(歌客)’
가곡, 시조, 가사 등을 노래로 부르는 전업 가수를 ‘가객(歌客)’ 이라 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의 집에 ‘가비(歌婢)’ 나 ‘가동(歌童)’을 두고 노래를 즐기기도 했다. 직업적인 ‘가객’은 17세기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8세기 전후로 전성기를 맞았다. 가객의 노래는 신분이 높고 부유한 사람이 주로 향유했는데, 공연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18세기 한양의 대표적인 ‘가객’이었던 ‘손고사’의 사례에서 생계형 가수의 수입을 추정할 뿐이다. 그의 노래가 절정에 이르면 사람들이 던지는 엽전이 비처럼 쏟아졌는데 열 냥 정도가 모이면 곧 일어나 떠나곤 했다. 열 냥이면 당시 쌀 한 가마 값이다. 부잣집이나 왕실행사의 공연료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객의 노래는 당시 사치스러운 문화상품이었던 것이다.
3. 유랑극단의 원조 ‘사당패’
떠돌아다니며 공연을 선보여 먹고 사는 무리를 ‘사당패’라 불렀다. 사당들은 무리를 지어 유랑하면서 재주를 선보이며 돈을 벌었고, 추워지면 본거지인 사찰로 돌아가 겨울을 나면서 기예를 연마했다. 이들은 어느 절에서 왔다는 사찰의 신표를 들고 다니며 공연을 하고 부적을 팔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사찰로 모여들었고 사당패의 숫자가 크게 늘었다. 명색은 사당패이지만 사실은 오갈 데 없는 유랑민이었다. 사당패는 공연과 함께 매춘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조선시대 문인들은 사당패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을 많이 남겼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사당패는 본거지와 특기에 따라 다양한 집단으로 분화되었는데, 그 중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 영화 ‘왕의 남자’에도 등장하는 모두 남자로 구성된 ‘남사당패’이다. 꼭두쇠를 중심으로 농악연주, 대접을 돌리는 묘기, 땅재주, 줄타기, 가면극 등을 선보이며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공연 중 부상으로 젊은 나이에 지팡이를 짚은 채 잘 걷지도 못한다거나, 성병으로 고생하기도 했다고 하니 그들의 고단한 삶이 엿보인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