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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0일 수요일

조선의 싱크탱크Think Tank 2편

■ 조선의 싱크탱크Think Tank 2편

■ 조선의 싱크탱크(Think Tank) 2편

태조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태종에게는 하륜(河崙, 1347~1416년)이 있었다. 하륜은 태종을 왕위에 올리는 데 기여하고, 왕이 된 태종을 보필하면서 마지막까지 ‘태종의 참모’로 살아갔다. 하륜이 본격적으로 태종의 참모가 되어가는 과정에는 ‘관상(觀相)’에 관한 일화가 있다.(태종실록) 하륜이 본래 관상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친구이자 태종의 장인인 민제를 보고, “내가 관상을 많이 보지만 공의 둘째 사위 같은 사람은 없었다. 내가 뵙고자 하니 공은 그 뜻을 말해주십시오”라 부탁했고, 결국 민제의 주선으로 태종을 만난 하륜은 마음으로 태종을 섬기게 됐다고 한다. 관상을 본 하륜이 이방원의 풍모(風貌)를 보고 먼저 접근했다는 것은 킹메이커로서 하륜의 자질을 잘 보여준다.

1402년(태종 2년) 하륜은 명 영락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로 가서 이듬해 4월에 명나라 사신 고득(高得) 등과 함께 황제의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고 귀국했다. 궁궐 안 신문고 설치와 지폐인 저화(楮貨) 유통과 같은 태종 시대의 주요 정책에도 늘 하륜이 있었다. 1401년 태종은 백성들의 민원을 듣는 신문고 설치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조정 신료들 다수가 우려를 표방했으나, 하륜은 신문고의 설치가 백성들에게는 큰 혜택이 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하륜은 고령임에도 관직에 있었다. 하륜은 70세가 되던 1416년 선왕의 능침을 순시하러 함길도(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지역의 조선 전기 명칭)에 들렀다가 객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죽는 날까지 태종의 참모로서 그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조선 역사상 가장 큰 전란은 임진왜란이었다. 7년에 걸친 장기전이 지속되면서 백성들의 희생은 컸고, 농업 경제 기반도 무너졌다. 왕은 백성을 버리고 피난을 갔고, 경복궁 등 문화재 손실도 엄청났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도 명 참모는 있었다. 전란 전 이순신을 천거하고 임진왜란 때 현장 지휘자의 역할을 했던 유성룡(柳成龍·1542~1607년)이나, 외교와 국방·경제 모든 분야에 능통하며 선조에서 인조대에 이르기까지 여섯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과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유성룡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좌의정과 병조판서·도체찰사를 겸하면서 전시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됐다. 그는 평양성 사수를 포기하고 의주로 피난하려는 선조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해놓고 또 골짜기까지 들어간다면 다시는 한양을 수복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6월11일 선조는 최흥원·정철 등과 영변을 향해 길을 떠났고, 유성룡은 순찰사 이원익 등과 함께 명나라 장수를 맞이하기 위해 평양에 머물렀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