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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9일 화요일

주화파 최명길 2편

■ 주화파 최명길 2편

■ 주화파 최명길 2편

그가 당론(黨論)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던 중 후금의 문제가 대두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정권 유지 차원이 아니라 나라가 망하느냐 유지되느냐의 중대한 문제였다. 1620년대 중반에 들어 후금은 우리에게 형제의 맹약을 맺자고 함과 동시에 명나라에 등을 돌려 후금에 협조하라는 외교적 압력을 넣었다. 조정 벼슬아치들 사이에는 후금에 맞서자는 척화론(斥和論)이 들끓었다. 이것은 광해군을 몰아낼 때 내건 명분이기도 했다.

최명길은 과감히 새로운 이론을 내세웠는데, 즉 변통(變通)의 논리였다. 변통이란 새롭게 전개되는 현실에 맞추어 때로는 명분을 굽혀서라도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명나라의 적인 후금과 겉으로는 화약을 맺고 안으로는 군대를 양성하여 앞날을 대비하면서 명에 대한 의리는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광해군이 추구한 실리외교를 조금 절충해서 ‘친명(親明)’의 관계는 유지하면서 ‘화금(和金)’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친명파의 거센 반대에 부딪쳤고, 끝내는 척화파의 주장대로 후금의 사신을 쫓아 보냈다.

1627년 조선으로 쳐들어온 후금의 군대를 피해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갔다. 인조는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의 강화 권유를 받아들여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후금의 군대가 물러난 뒤에 모든 비난의 화살이 최명길에게 쏟아졌다. 그의 정치적 위치가 흔들렸지만 인조는 그를 감싸주면서 경기관찰사로 임명하여 전후(戰後)의 일을 처리하게 했다. 일단 조정에서 한 발 물러나 있게 한 것이다.

그 뒤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조선에 “조공을 하라”거나 “청을 황제의 나라로 받들라”고 요구해 왔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특히 1636년에 들어 청나라의 요구는 아주 강경했고, 요구를 듣지 않으면 다시 침략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최명길은 병으로 집에 누워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왕에게 ‘만언(萬言)의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유명한 ‘병자봉사(丙子封事)’인데, 여기에서 그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일단 나라를 구하고 난 뒤에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조정의 척화론(斥和論)에 막혀 버렸다.

이해 겨울 청의 대군이 밀려들자, 비빈과 종친들은 강화도로 들어갔으나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미처 강화도까지 가지도 못하고 급히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남한산성에서 버티는 한 달 동안 성 안팎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산성 안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던 조선 조정은 오랑캐의 막강 파워 앞에 전 국토가 황폐화되자 크게 당황했다. 대책을 강구하던 조정 관리들은 각자의 정치 견해에 따라 주전파=척화파와 주화파 두개로 갈라져 논쟁을 벌였다.

최명길은 별도리가 없으니 청과 화친하자는 주화파(主和派)의 리더였다. 김상헌은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주전파(主戰派=斥和派)의 대표 주자로, 인조반정 이후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대사헌을 잇달아 지낸 후 병자호란 당시에는 예조판서로 나라의 외교와 교육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최명길의 주화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오랑캐 족속인 청나라에 결코 머리를 조아려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주장이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2024년 3월 18일 월요일

주화파 최명길 2편

■ 주화파 최명길 2편

■ 주화파 최명길 2편

그가 당론(黨論)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던 중 후금의 문제가 대두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정권 유지 차원이 아니라 나라가 망하느냐 유지되느냐의 중대한 문제였다. 1620년대 중반에 들어 후금은 우리에게 형제의 맹약을 맺자고 함과 동시에 명나라에 등을 돌려 후금에 협조하라는 외교적 압력을 넣었다. 조정 벼슬아치들 사이에는 후금에 맞서자는 척화론(斥和論)이 들끓었다. 이것은 광해군을 몰아낼 때 내건 명분이기도 했다.

최명길은 과감히 새로운 이론을 내세웠는데, 즉 변통(變通)의 논리였다. 변통이란 새롭게 전개되는 현실에 맞추어 때로는 명분을 굽혀서라도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명나라의 적인 후금과 겉으로는 화약을 맺고 안으로는 군대를 양성하여 앞날을 대비하면서 명에 대한 의리는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광해군이 추구한 실리외교를 조금 절충해서 ‘친명(親明)’의 관계는 유지하면서 ‘화금(和金)’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친명파의 거센 반대에 부딪쳤고, 끝내는 척화파의 주장대로 후금의 사신을 쫓아 보냈다.

1627년 조선으로 쳐들어온 후금의 군대를 피해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갔다. 인조는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의 강화 권유를 받아들여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후금의 군대가 물러난 뒤에 모든 비난의 화살이 최명길에게 쏟아졌다. 그의 정치적 위치가 흔들렸지만 인조는 그를 감싸주면서 경기관찰사로 임명하여 전후(戰後)의 일을 처리하게 했다. 일단 조정에서 한 발 물러나 있게 한 것이다.

그 뒤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조선에 “조공을 하라”거나 “청을 황제의 나라로 받들라”고 요구해 왔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특히 1636년에 들어 청나라의 요구는 아주 강경했고, 요구를 듣지 않으면 다시 침략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최명길은 병으로 집에 누워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왕에게 ‘만언(萬言)의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유명한 ‘병자봉사(丙子封事)’인데, 여기에서 그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일단 나라를 구하고 난 뒤에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조정의 척화론(斥和論)에 막혀 버렸다.

이해 겨울 청의 대군이 밀려들자, 비빈과 종친들은 강화도로 들어갔으나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미처 강화도까지 가지도 못하고 급히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남한산성에서 버티는 한 달 동안 성 안팎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산성 안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던 조선 조정은 오랑캐의 막강 파워 앞에 전 국토가 황폐화되자 크게 당황했다. 대책을 강구하던 조정 관리들은 각자의 정치 견해에 따라 주전파=척화파와 주화파 두개로 갈라져 논쟁을 벌였다.

최명길은 별도리가 없으니 청과 화친하자는 주화파(主和派)의 리더였다. 김상헌은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주전파(主戰派=斥和派)의 대표 주자로, 인조반정 이후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대사헌을 잇달아 지낸 후 병자호란 당시에는 예조판서로 나라의 외교와 교육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최명길의 주화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오랑캐 족속인 청나라에 결코 머리를 조아려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주장이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