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기양단執其兩端 - 양극단을 바르게 잡아 치우치지 않다, 중용을 실천하다.
집기양단(執其兩端) - 양극단을 바르게 잡아 치우치지 않다, 중용을 실천하다.
잡을 집(土/8) 그 기(八/6) 두 량(入/6) 끝 단(立/9)
일상에서 많이 듣는 中庸(중용)의 말은 쉽다.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에 있다, 그래서 홀로 떳떳하다 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중용은 어렵다. 뜻은 알아듣기 쉽다고 해도 실천에는 성인도 어렵기 때문이다. 몇 가지 사례만 보자.
孔子(공자)가 극단적인 경향과 소극적인 성향의 두 제자를 깨우치면서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過猶不及(과유불급)이라 했다. 孟子(맹자)에는 중용을 취했더라도 그것을 판단할 공정한 저울이 없으면 執中無權(집중무권)이라며 또 하나의 고집이 되고 만다는 말이 나온다.
공자의 손자 子思(자사)가 엮은 ‘中庸(중용)’에는 서명처럼 다양하게 언급된다. 먼저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한다(知者過之 愚者不及也/ 지자과지 우자불급야)고 말한다. 또 군자가 중용을 행하더라도 때에 알맞게 해야 한다(君子而時中/ 군자이시중)고 했다.
공자가 堯(요)임금의 뒤를 이은 舜(순)임금을 평해 큰 지혜로 치우침이 없었기에 성군이 될 수 있었다고 했다. 바로 성어가 나오는 ‘양 극단을 바르게 잡아 가장 적절하게 백성에게 행하였다(執其兩端 用其中於民/ 집기양단 용기중어민)’는 부분이다. 이처럼 어려운 중용이니 禹王(우왕)에게 선양하면서도 신신당부한다. ‘오직 정성을 다해 하나 돼야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으리라(惟精惟一 允執厥中/ 유정유일 윤집궐중).’ 이 말은 書經(서경)에 있다.
부족해도 만족함을 알고 넘치는 것을 더 경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다른 데서도 많이 접한다. 老子(노자)의 道德經(도덕경)의 구절을 떼어 보자. 運夷章(운이장)이다. ‘황금과 보옥이 집에 가득 있더라도 그것을 능히 지킬 수 없고(金玉滿堂 莫之能守/ 금옥만당 막지능수), 부귀한 지위에 교만이 더해지면 스스로 허물을 입게 될 것이다(富貴而驕 自遺其咎/ 부귀이교 자유기구).’ 洪自誠(홍자성)의 菜根譚(채근담)에는 중용을 터득한 수양자를 이렇게 나타낸다.
‘청렴하고 능력 있으면서도 너그럽고, 어질면서도 결단력이 있고, 총명하면서도 지나치게 살피지 않고, 강직하면서도 지나치게 따지지 않는다(淸能有容 仁能善斷 明不傷察 直不過矯/ 청능유용 인능선단 명불상찰 직불과교).‘ 설명이 많은 만큼 어렵다는 것을 알겠다.
성인도 어려운데 보통 사람이 욕심을 제어하기는 불가능하다. 욕심이 아니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 최상이라고 고집하며 다른 의견을 묵살하는 것도 예사다. 세상이 양극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데 중간지대는 양쪽에서 회색분자라며 욕한다.\xa0상대를 가장 넓게 인정해야 하는 정치권에선 그야말로 사생결단이니 중도는 더욱 어렵다. 조금만 내려놓으면 상생이 가능한데도 욕심이 앞서니 예나 지금이나 중용이 희귀한 모양이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