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종반정 3편
■ 중종반정 3편
박원종은 곧바로 대비전을 찾아가 정현왕후 윤씨를 설득하여, 진성대군이 왕위를 잇도록 교지를 내리게 했다. 반정군에 동조하거나 도망쳐서 텅 빈 궁에서 반정군은 대비를 모시고 나와 진성대군 이역(李懌)을 왕으로 추대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 신수영(愼守英) 형제와 임사홍을 처단했다. 연산군의 여인 장녹수는 반정군의 칼을 맞은 후, 분노한 군중으로부터 돌을 맞아 순식간에 돌무덤이 만들어졌으며, 연산군의 아들들은 각기 따로 유배되었다가 곧 사사되었다. 연산 역시 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도 교동에 유배 되었다가 두 달 만에 역질로 죽고 말았다. 잔인한 폭정으로 민심을 잃은 대가였다. 자기 세력도 없이 오직 피바람만으로 절대 권력을 향해 질주했던 최악의 군주 조선 10대 왕 연산군. 20세에 왕위에 올라 12년을 왕위에 있으면서 피바람으로 세운 절대 권력을 오로지 자기의 향락에만 사용했기에 사후 묘호를 받지 못함은 물론, 종묘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폭군의 대명사로 남아있다.
별다른 저항이나 충돌 없이 거사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11대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이다. 이것이 조선 건국 이후 최초의 반정인 중종반정(中宗反正)이다. 조선왕조에서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바꾼 첫 번째 사건이다. 왕조를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역성혁명조선건국과는 다르다.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을 물리치고 새로운 임금을 새워 옳은 정치를 이루려는 반정의 대열에 신하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조선 시대 군신 간의 권력 관계가 서서히 재편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중종은 준비되지 않은 왕이었다. 중종반정 당일 날 자기 집 앞으로 군사가 밀려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중종은 이복형인 연산군이 자기를 죽이러 보낸 군사인 줄 알고 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중종 부인 신씨(연산군 궁중세력 대표인물 신수근의 딸)가 집에 도착한 군사가 말머리를 어디로 향하는 가를 보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며 자살을 만류했다. 신씨 말대로 군사들의 말머리는 집 바깥쪽을 향해있어 중종을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보호하러 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처럼 종종은 반정 당일까지도 자기가 왕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중종이기에 즉위 초에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다. 박원종, 성희안 등 반정공신의 위세에 눌려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오죽하면 중종반정으로 역적이 된 신수근의 딸인 조강지처 신씨 부인도 궁으로 데리고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조강지처 신씨를 지척에 두고도 신씨가 죽을 때까지 궁으로 부르지 못한 채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 신씨가 중종이 궁궐에서 자기 치마라도 볼 수 있도록 인왕산에 자기가 입었던 치마를 항상 걸어 놨다는 애뜻한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만이 남아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