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종의 여인들 문정왕후 1편
■ 중종의 여인들 문정왕후 1편
장경왕후가 죽고 다시 왕비 자리가 공석이 되자, 그해 10월 영의정 유순, 좌의정 정광필, 우의정 김응기 등이 왕비 책립을 건의했지만, 중종은 이미 국본이 정해졌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며 거절하다가 결국 처녀간택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17세의 새 왕비가 간택되었으니 바로 파산부원군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 윤씨이다. 그녀의 자태는 비록 아름다웠으나 성질이 매우 앙칼스러워 앞으로의 순탄치 않은 궁중생활이 예상되었다.
문정왕후는 인수대비와 정순왕후 등과 함께 사극드라마의 단골 주인공이되었다. 그만큼 정치사에 있어서도 최고의 치맛바람을 일으켜서 그런 것 같다. 그녀로 말미암아 전비(前妣) 장경왕후 소생인 인종의 수명까지 단축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정왕후 이전에는 왕비가 사망하면 후궁에서 왕비를 선발했었는데, 문정왕후는 후궁을 거치지 않고 바로 왕비에 책봉된 조선 왕조 최초의 외부 간택 왕비이다.
1529년(중종 24년) 9월 13일에도 부여의 선비 김식이 다시 상소를 올려 신씨 폐출의 부당함을 제기했지만 무시되었다. 이제 폐비 신씨의 복위 논의는 완전히 물 건너가 버렸다. 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인종은 승정원에 명하여 폐비 신씨의 거처를 폐비 궁으로 부르고, 모든 일을 후궁의 거처인 자수궁의 예와 같이 행하라고 전교했다. 조선의 임금 중에 가장 짧은 8개월의 재위 기록을 세운 인종이 왕비 중에 7일이라는 가장 짧은 기록을 가진 폐비 신씨를 살뜰하게 배려했다하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 후 사가(私家)에서 홀로 살던 폐비 신씨는 1557년(명종12년) 12월 7일, 71세를 일기로 외로운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부음을 들은 명종은 신하들에게 명하여 왕후의 예로 장사지내게 했다. 또 왕실 가족의 관을 다루는 장생전의 관을 내리게 하고, 부의를 보냈으며 자식이 없는 그녀의 사정을 고려하여 친정조카인 신사원에게 상주가 되어 제사를 받들게 했다.
그처럼 인종과 명종은 모두 폐비 신씨가 중종의 원비(元妃:조강지처)로서 모후와 같은 위상을 지녔고, 그녀를 대신하여 자신들의 어머니가 중전의 자리에 올랐음을 인식하고 나름대로의 예를 다했던 것이다. 그 후 신씨의 복위 문제는 1698년(숙종 24년) 신규의 상소문에서 단종 복권 문제와 함께 거론되었지만 주목받지 못했지만, 결국 신씨의 복위는 1739년(영조1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당시 유생 김태남이 복위 상소를 올리자 영조는 흔쾌히 받아들여 그녀의 신주를 대궐 안에 옮겨 모시게 했다. 이어서 대신들과 논의 끝에 시호를 단경(端敬)으로 하고 능호를 온릉(溫陵)으로 올렸다. 그렇게 해서 폐비 신씨는 궁궐에서 쫓겨난 지 무려 232년 만에 단경왕후(端敬王后)라는 왕비의 칭호를 얻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