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종의 여인들-단경왕후 신씨 2편
■ 중종의 여인들-단경왕후 신씨 2편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반정 공신들이 끈질기게 요구했다.
“거사할 때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대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신수근의 친딸이 궁중에 있습니다. 만약 왕비로 책봉한다면 인심이 불안해지고, 인심이 불안해지면 종묘사직에 관계될 터이니, 은정을 끊고 밖으로 내치소서.”
종묘사직을 위해 이혼하라는 뜻이었다. 중종은 “아뢰는 바가 심히 마땅하지만 조강지처인데 어찌 그리하랴?” 라고 되물었다. 내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공신들은 “종묘사직의 대계를 위해서는 주저하지 마시고 쾌히 결단하소서”라며 중종을 압박했다.
결국 중종반정 직후 8일 만에 신수근의 딸인 왕비 신씨는 신하들의 강권에 의해 궁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중종은 신하들의 강압에 못 이겨 신씨를 사저로 폐출하기는 했으나, 그녀에 대한 정은 잊을 수가 없었다. 잠을 잘 때나 조석을 들 때나 매양 신씨가 곁에 있는 것만 같았고, 폐출되었다는 사실이 느껴질 때마다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에 그리움이 더욱 더 짙어만 갔다. 신씨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루던 젊은 중종은 그녀가 나가 있는 집이라도 바라보리라는 일념으로, 자주 높은 누각에 올라 망연히 신씨가 있는 집을 바라보곤 하였다. 신씨는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인왕산에 살며 아침마다 집 뒤 바위에 궁중에 있을 때 잘 입던 분홍치마를 걸어놓아 자신의 안부를 알렸다. 그래서 전설로 전하는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한다.
이후 중종 역시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곳인 모화관에 행차할 때마다 자신의 말을 신씨에게 보냈는데, 그때마다 신씨는 죽을 쒀서 보냈다. 비록 강제로 이혼을 당하기는 했지만 부부간의 애정은 여전했던 것이다. 그렇게 50여년을 살던 신씨는 71세 때 세상을 떠났다.
그 애절한 사연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죽은 지 180여년이 지난 영조 때 단경왕후로 책봉되었다. 권력의 비정함이 불러온 비극이었다. 비록 폐위되었지만,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단지 연산군의 장인(신승선)의 일족이자 신수근(신승선의 아들)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폐위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정상 참작이 된 것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