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대첩 1편
■ 진주대첩 1편
매년 10월이면 진주성과 그 앞 남강을 화려한 불빛으로 물들이는 ‘진주남강유등축제’가 열린다. 또 10월 10일 ‘진주시민의 날’의 기원도 1592년 10월 10일 대승을 이룬 ‘진주대첩’에서 찾을 수 있다. 임진왜란 중 일어났던 많은 전투 중 이순신장군의 한산도대첩,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김시민장군의 진주대첩을 3대 대첩(大捷)이라 칭한다. 그 만큼 큰 승리를 이끌어내어 왜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전투들이다. 그 중에서도 진주대첩은 첫손에 꼽힐만한 전투이면서도 그 역사적 의미에 비해 조명을 덜 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군의 큰 승리로 끝난 진주대첩은 왜군에게는 최대의 치욕(恥辱)적인 전투였다.
왜군은 왜 진주성 함락에 총력을 기울였을까? 진주대첩 이전의 전쟁 상황을 보면 왜군은 1592년 4월 14일 부산에 상륙, 부산진을 점령한 이후 곧바로 북상하면서 4월28일 한성 진입의 방어선인 탄금대(彈琴臺)를 뚫고 5월 3일 한성에 입성했고, 6월15일에는 평양성을 점령하며 파죽지세로 승승장구(乘勝長驅)했다. 그런데 6월에 명나라가 원군을 파병했고,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군은 점차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후 전쟁은 장기전에 돌입했다.
특히 이순신장군의 활약과 남부지방의 의병활동으로 왜군은 후방의 보급선이 끊길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경상우도 의병의 본거지가 바로 진주(晉州)였다.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해서 교두보(橋頭堡)로 삼고, 곡창지대인 호남을 침략하여 군량미를 확보, 장기전에 대비하고자 했다. 그래서 왜군은 경상좌도에 주둔했던 병력과 한성에 주둔했던 병력 중 일부를 보강한 3만 대군으로 진주성을 공격했다.
반면, 조선은 전쟁이 장기전으로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진주성을 지킴으로써 우리의 전쟁 수행능력을 받쳐줄 후방기지가 되는 전라도를 지킬 수 있었고, 경상우도가 안전해졌을 뿐 아니라 조선 수군의 주력 전라좌수영도 보호하여 조선 수군의 후방이 든든해졌다. 그 결과 조선의 전쟁 수행능력은 높아졌고, 일본의 전쟁 수행능력과 의지가 결정적으로 꺾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조선에 상륙한 이후 일본군은 연승을 거듭하며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진주성에서 대패를 함으로써 조선군의 사기를 높였고, 이젠 일본이 아니라 조선군으로 전쟁의 흐름이 바뀌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일본군이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낸 진주성 싸움에는 맡은 바 직분을 다한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있었고, 그와 함께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된 민초(民草)들이 있었다. 진주성에서의 완전한 참패로 일본군은 전세가 불리해져 퇴각해야 했기 때문에 일본군에게 1차 진주성 싸움은 치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강화회담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만 대군으로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왜군은 성안에 있는 관민(官民) 6만 명을 전멸(全滅)시켰다. 이때 우리가 알고 있는 기생 논개(論介)가 적장을 끌어안고 죽었다고 한다. 8개월 전에 일어난 1차전(진주대첩)에 대한 보복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도륙(屠戮)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진주성에서의 패배가 얼마나 일본군에게 치욕적인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