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대첩 4편
■ 진주대첩 4편
처음 왜군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이른 시간은 약 30일이다. 김해에서 9월 24일 출발한 그들이 진주성 외곽에 진출해 자리 잡은 것은 10월 5일로 10일 정도 걸렸다. 전쟁 초의 진군 속도라면 이틀이면 충분했을건데, 10일 정도 걸렸다는 것은 창원성, 함안, 부다현 등에서 조선군의 저항이 생각 이상으로 끈질기고 강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쯤, 경상우병사 류숭인장군, 사천현감 정득열, 가배량권관 주대청 등이 이끄는 수백의 군사가 진주성 동문에 와서 입성(入城)하여 같이 싸우기를 청했다. 진주 목사 김시민장군은 "적병이 이미 어울렸으므로 성문을 엄하게 경계하고 있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열고 닫으면 창졸(倉卒:급작그러움)의 염려가 있을 것이니, 주장(主將)은 밖에서 응원함이 옳습니다." 라고 하면서 입성을 거부했다. 결국 입성하지 못한 이들은 외곽에 머물면서 일본군과 격전(激戰) 끝에 모두 장렬하게 전사했다.
진주 목사 김시민장군의 이 결정에 대해 논란은 있다. 먼저 상관인 경상우병사 류숭인장군에 대한 항명(抗命)이라는 지적과 함께 위기에 처한 아군을 외면해서 다 죽게 만들었으므로 아주 비정하다는 평가도 있다. 반면, 곽재우 의병장의 견해를 빌리자면, “비정하긴 해도 이기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고 보는 쪽도 있다. 진주성은 진주 목사 김시민장군이 이끌며 전술과 전략을 준비해 왔는데, 상관(上官)이 들어오면 서로 명령(命令)이 갈리며 지휘부가 분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은 이때 그의 행동이 논란거리가 되고, 후에 이것 때문에 책임을 추궁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해봤을까? 결과가 좋다면 그의 해명이 먹힐 수도 있겠지만, 만약 지기라도 한다면 그를 향한 비난과 책임 추궁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시민장군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단력 있는 그의 성격이 빚어 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김시민 장군이 상관인 경상우병사 류숭인장군의 병력을 외면한 것에 대해 전투 중이나 후에도 그가 질책을 받았다거나, 군령(軍令)을 받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성 내에는 엄연히 경상도 전체의 군마를 지휘하는 경상우도 초유사이면서 관찰사인 학봉 김성일선생도 함께 있었으니, 관찰사 학봉 김성일선생의 묵인 또는 승인이 있었거나 아니면 김시민장군의 판단을 전적으로 지지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학봉 김성일선생도 상관이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무관(武官)인 목사 김시민장군을 전적으로 신임하고 맡긴 것으로 보인다.
진주 목사 김시민장군의 지휘 하에 진주성은 일본군의 파상공격을 막아내며 굳건히 버텨내고 있었다. 경상우도 각지의 의병들 그리고 전라도 의병부대까지 속속 도착하며, 서서히 조선군에 승리의 기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당황하고 초조해졌다. 진주성을 공략하다가 생각 이상으로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진전은 없고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