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대첩 7편
■ 진주대첩 7편
10월 9일 저녁 일본군은 횃불을 들고 서로 왕래하며 진주성 내의 이목을 끌었다. 막사에 불을 지르고 짐을 싸서 돌아가는 모습을 보란 듯이 보인 것이다. 일종의 기만책이었다. 마침, 왜군 진영을 탈출해 온 사람이 있어 붙잡아 적의 동태(動態)를 물으니, 왜군이 새벽에 온 힘을 다해 공격할 것이라 했다. 아주 중요한 정보였다.
퇴각하는 척 하던 왜군은 곧 불을 끄고 빠른 속도로 되돌아와서 10월 10일 새벽 총 공격을 가했다. 진주성의 민간인들은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쏟아 붓는 등 사력을 다했고, 6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김시민장군은 공세가 가장 거센 동쪽을 한눈에 보고 지휘할 수 있는 동문 북격대에서, 판관 성수경 장군은 동문 옹성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버텨냈다.
그 틈에 갑자기 적의 한 무리가 구북문(舊北門)에 접근하여 당황한 군민이 무너져 흩어졌으나, 다행히 북쪽을 지키던 최덕량장군과 군관 이눌 등이 앞장서서 죽기로 싸워 버티는 사이 군민들이 다시 결집해서 죽기로 싸워 적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성 내에는 적에게 던질 돌과 기왓장이 다 떨어지고, 우물물이 다 마를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일본군이 주춤하며 전투는 마무리되는 듯 했으나 또 다시 큰 위기가 닥쳤다. 진주성의 지휘관인 목사 김시민장군이 전투 막바지에 시체더미에 숨어 있던 일본군의 저격으로 왼편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이 날 부상을 입은 김시민(金時敏)은 두 달 뒤 숨을 거두었다. 다시 몰려 들어오는 일본군을 쓰러진 김시민장군을 대신해서 곤양군수 이광악장군이 분투(奮鬪)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활솜씨에 일가견(一家見)이 있던 명궁(名弓)인 이광악장군은 적군 앞에 서서 돌진해 오던 일본군 장수를 활로 쏘아 죽이면서 기세를 꺾었다. 일본군은 결국 진주성을 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일본군에게 총 7년의 전쟁을 통틀어 가장 큰 패배이고, 치욕적인 패배였다. 진주성을 지키던 조선군은 3천 8백, 그리고 외곽에서 적을 견제하며 진주성을 지원한 의병 3~4천 정도가 참전했는데, 전사자는 약 8백여 명에서 최대 천명 가까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뼈아픈 손실은 진주대첩이란 대역사를 만들어낸 영웅, 진주 목사 김시민장군을 잃었다는 것이다. 일본 측 기록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병사 1만 명 장교 이상은 3백명으로 3만 군대 중 1만을 잃었다.
본국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에서의 패전 소식을 접하고는 불같이 노해서 펄펄 뛰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주성에 대한 보복전과 진주 목사의 목을 가져오라고 수차례 지시하는데, 이는 다음 해 1593년 6월의 2차 진주성 전투로 이어지는 이유가 되었다. 일본에서 진주성은 모쿠소성이라고 알려졌는데, 이는 ‘목사(牧使)가 있는 곳’이란 뜻의 목소성(牧所城)의 일본식 발음에서 나온 말이다.
"왜군은 2차 진주성 공격 때까지 김시민(金時敏)의 죽음을 몰랐다. 당시 후임 목사는 서해원이었는데,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된 뒤 일본군은 목사(牧使) 서해원을 찾아내 그의 목을 베어 조선의 맹장(猛將) 목사라는 이름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아마도 김시민장군으로 착각하고 보복을 했다고 생각했으리라.
",- 8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