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대첩 8편
■ 진주대첩 8편
진주대첩에서 우리가 승전한 이유는 기적이 아니라 준비된 결과였다. 진주대첩은 3천8백의 병력으로 3만 일본군이라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력을 딛고, 일주일 주야에 걸쳐 죽기 살기로 싸워 이긴 기적의 승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만약 충무공 김시민장군이 그곳에 없었다면 ‘진주대첩’이란 역사에 남을 대승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진주대첩은 충무공 김시민장군이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획한 전투이다. 1591년 판관으로 진주에 부임해 온 그는 행정에 있어서 공명정대(公明正大)했고, 덕의(德義)를 베풀어 위엄을 세우니 예하 장졸과 관속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감복(感服)하였다. 이것은 관민(官民)이 하나가 되어 전투에 임하면서 김시민장군을 전적으로 믿고 따를 수 있었던 이유이다.
평소 김시민장군이 민심을 잘 다스렸고 신뢰를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백성들이 지휘관인 김시민장군을 신뢰하지 못했다면, 거의 10배 가까운 적들에게 포위되어 맹공격을 받는 힘든 전투 상황과 적들의 집요한 심리전에서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장수(將帥)로서, 목민관(牧民官)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그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진주성은 본디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라 여러 가지 약점도 있었다. 성의 규모는 큰데 비해서 수적으로 턱없이 모자란 병력과 훈련이 덜된 군사들, 그리고 미흡한 전쟁 준비까지 진주성은 위기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쟁 발발 후 목사 이경을 호송해서 지리산으로 피신했다가 목사 이경이 병사한 후에 복귀해서 진주 목사 대행으로 임명된 그의 전쟁 준비는 짧은 기간에 비해 상당히 효과적으로 수행되었다.
먼저, 진주성의 약점은 무장으로서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성을 부수고 새로 지을 시간은 없지만, 주어진 시간과 상황 속에서 진주성의 약점을 보강하고자 노력했다. 참호를 파서 성의 방어력을 보완했고, 군량을 비축하고 무기들을 수리하거나 새로 제작했다. 특히 염초 510근과 총통 170여 자루를 제조해 둔 것은 진주대첩 때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충무공 김시민장군은 훈련원과 군기시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었고, 또 북방의 6진 지역에서 실전(實戰)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그때 위력을 발휘했던 승자총통 등 무기의 쓰임새와 사용법, 위력을 잘 알고 있는 무관(武官)이었다. 그리고 성을 지킬 수성군(守城軍)을 새로 모집해서 천여 명의 병력을 3천 이상으로 증강했고, 이들을 맹훈련을 시켜 군사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병력의 수가 많으면 좋겠지만, 중요한 것은 훈련이 잘되어 있는 능력 있는 정예(精銳) 군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군사는 강한 훈련과 실전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충무공 김시민장군은 맹훈련으로 조련된 군사들을 데리고 거창, 사천, 고성, 진해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고, 경상우도 진주 주위의 일본군을 토벌하면서 진주의 방비를 굳건히 했다. 이 과정에서 군사들은 실전경험을 갖추고 잇따른 승리로 자신감과 사기가 높아졌으며, 그들의 지휘관 김시민장군의 능력을 신뢰하고, 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게 된 것이다.
김시민장군은 전쟁이 끝난 후 선무공신(宣武功臣) 18명 중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영의정에 봉해졌다. 상락부원군의 작호와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충무공 김시민장군이 쓰러진 후 그를 대신해 지휘해서 승리를 이끌었던 곤양군수 이광악 장군은 이후에도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전투를 전전하며 활약을 이어갔고, 그 공을 인정받아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광평군이란 작호와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받았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