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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일 월요일

짝사랑에 빠진 세조의 후궁

■ 짝사랑에 빠진 세조의 후궁

■ 짝사랑에 빠진 세조의 후궁

세조에게는 후궁이 세 명 있었다. 박팽년의 딸인 근빈 박씨 , 신숙주의 딸인 숙원 신씨, 그리고 소용 박씨이다. 이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산 사람이 소용 박씨이다. 본명은 박덕중으로 세조가 즉위 전 잠저(潛邸)에 있을 때 첩으로 맞이하였다. 세조가 즉위하자 궁에 함께 들어왔다가 세조 5년(1459년)에 아들을 낳았고, 그 공로로 정3품 소용(昭容)이 되었다. 그런데 박씨가 낳은 왕자 아지(阿只)는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요절(夭折)하고 말았다. 세조는 정희왕후 윤씨와 금슬이 매우 좋은 편이었고, 그다지 여색을 탐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피부병과 종기 등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탓에 자연스럽게 소용 박씨를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직 20대의 젊은 나이로 아들을 잃은 슬픔에 더해 극심한 외로움을 견뎌야만 했던 소용 박씨는 ‘송중’이라는 환관을 짝사랑하게 되었다.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박씨는 환관 송중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마음을 거리낌없이 표현했다. 반면 송중은 아주 곤란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왕의 후궁이 구애를 해오니, 이 일이 알려지면 둘 다 죽은 목숨이다. 결국 송중은 세조에게 이 일을 그대로 고해바쳤다.

세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후궁이 환관에게 마음을 뺏긴 것이니 왕이 아닌 일반 사람의 입장에서도 이만저만한 수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알면 그것이 더 큰 수치였으므로 세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덮어두기로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소용 박씨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귀성군 이준을 짝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귀성군은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아들이므로 세조에게는 동생의 아들, 즉 조카였다. 귀성군은 25살의 뛰어난 용모를 지닌 청년으로, 문무를 겸비하여 무과에 장원급제한 당시 최고의 엄친아였다. 그런 귀성군을 세조는 몹시 총애하여, 귀성군이 겨우 18세일 때 병조판서를 제수할 정도였다. 세조가 그토록 귀성군을 총애하다보니 두 사람이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그럴 때 박씨도 귀성군을 자주 보게 되었고, 그만 짝사랑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환관 최호와 김중호를 이용하여 자신 또래인 귀성군에게 한글로 연애편지를 써서 전달하였다. 귀성군은 참으로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귀성군은 아버지 임영대군과 대책을 논의했다. 임영대군이라고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귀성군과 그의 아버지 임영대군은 이 사실을 세조에게 즉시 알렸다.

이번에는 세조도 더 이상 덮어둘 수 없었다. 세조는 박씨를 잔심부름을 하는 하급 궁녀로 강등시켜버렸다. 궁중법도대로 하자면 마땅히 참수형에 처해야 하는 중죄이지만, 신하들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옛정을 생각해서 목숨을 살려준 것이다. 하지만 짝사랑에 눈이 먼 박씨는 또다시 귀성군에게 구애편지를 보냈고, 귀성군은 이번에도 세조에게 고해바쳤다. 결국 세조는 편지를 전달한 환관 최호와 김중호를 때려죽이고, 박씨는 교수형에 처했다. 짝사랑이 불러온 비극적 결말이었다. 신하들은 귀성군에게도 죄를 물어야 한다고 했지만, 귀성군은 아무 죄가 없다고 하여 끝내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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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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