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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1일 목요일

창의적 난방장치, 온돌

■ 창의적 난방장치, 온돌

■ 창의적 난방장치, 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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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놀랍도록 인상적으로 받아들이는 한국문화 중의 하나가 온돌이라고 한다. 온돌(溫突)은 한자를 그대로 풀어 해석해 보면 따뜻한溫 굴뚝突이라는 뜻이다. 우리말로는 ‘구들’이라고도 하는데, 방바닥을 뜨끈하게 만드는 우리나라 특유의 난방장치를 말한다. 과거에 비해 주거형태가 대부분 아파트로 바뀌었고, 나무를 때던 재료가 기름이나 가스 등 다양한 형태로 바뀌었지만, 방바닥을 데워서 따뜻하게 하는 온돌의 기본적인 난방 방식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뜨거운 불기운이 고래라고 부르는 방바닥 밑의 공기 통로를 타고 이동하면서 방바닥인 구들장을 달구게 하는 방식이다. 서양의 벽난로는 위로 빼놓은 높은 굴뚝으로 연기를 바로 내보내지만, 온돌은 불을 눕혀 방바닥 밑으로 흐르게 하면서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집을 따뜻하게 하고, 방 내부에 연기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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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온돌을 개발해 사용했을까? 학자들은 온돌이 철기시대 한반도 북부나 중국의 동북부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개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원시적 온돌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온돌문화가 2000년 이상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중국 구당서에 『고구려 사람들은 겨울철에는 긴 구덩이를 만들어 밑에서 불을 때어 따뜻하게 한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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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처음부터 온돌이 계층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고구려 등 북쪽의 추운 지방에서 사용하다가 북쪽에 살던 사람들이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고구려를 거쳐 백제와 신라로 전해졌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방 전체에 구들장을 놓은 것이 아니라, 일부 공간만을 온돌방으로 꾸몄다. 집의 일부에만 구들을 설치했다고 해서 쪽구들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태종 17년(1417년) 온돌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성균관 학생이 아픈 경우에 온돌방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온돌방을 지으라는 내용이 있다. 집 전체에 온돌을 설치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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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구들을 집 전체에 까는 방식은 조선 후기(16~17세기경)부터 널리 퍼져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이전의 사극(史劇)을 보면 의자에 앉아 생활하는 장면이 나온다. 17세기 이후 온돌이 널리 퍼지게 되면서 조선은 의자에 앉아서 생활하는 문화에서 방바닥에 앉아 생활하는 좌식 문화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문화재청은 2018년 온돌문화라는 이름으로 온돌을 국가무형문화재(제135호)로 지정했다. 온돌이 사회문화적으로 한국인의 삶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특히 온돌문화를 통해 한반도가 처한 기후 환경에 지혜롭게 적응하고 대처해온 우리 선조들의 창의성을 높이 평가하고, 중국과 일본 등 주변 국가의 난방 방식과 구별되는 고유한 양식이라는 독자성에도 중요한 의미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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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