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거후공前倨後恭 - 전에는 거만하다 뒤에는 공손하다, 처지에 따라 태도가 바뀌다.
전거후공(前倨後恭) - 전에는 거만하다 뒤에는 공손하다, 처지에 따라 태도가 바뀌다.\xa0
앞 전(刂/7) 거만할 거(亻/8) 뒤 후(彳/6) 공손할 손(心/6)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평소 말하는 대로 행동하면 知行合一(지행합일)이고 言行一致(언행일치)가 된다. 겉과 속이 같아야 도리를 다한 사람이라 우러름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속물이 더 많았기에 이에 관한 말이 압도적이다.
겉으로 꿀 바른 소리를 하고선 돌아서서 남을 해친다고 口蜜腹劍(구밀복검)이나 綿裏藏針(면리장침), 笑裏藏刀(소리장도) 등이 있다. 뱀의 마음에 부처의 입 蛇心佛口(사심불구)도 같다. 이보다는 덜해도 뒤에서는 돌아서는 面從腹背(면종복배)나 羊頭狗肉(양두구육)도 表裏不同(표리부동)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거만하게 우쭐거리다가(前倨) 나중에는 공손하다(後恭)는 이 말은 상대의 입지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백팔십도 바뀌는 것을 말한다. 중국 戰國時代(전국시대)의 蘇秦(소진)은 張儀(장의)와 함께 말 잘 하는 사람의 대명사였다. 소진은 당시의 강국 秦(진)에 맞서려면 작은 나라가 연합해야 한다는 合縱策(합종책)을 주장하여 楚燕齊韓魏趙(초연제한위조)의 6국에서 재상이 되었다. 이런 소진도 출세하기 전에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처음 실패한 뒤 집에 돌아왔을 때 식구들은 냉대하기만 했고 형수는 밥상을 차려주는 것을 거부했다.
분발한 소진은 집에 틀어박힌 채 책과 씨름하여 독심술을 통달했다. 이후 육국의 왕을 찾아 세 치 혀로 유세한 결과 모두에게 뜻이 받아져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됐다. 한 나라를 방문하는 길에 고향을 지나게 됐는데 일행이 임금에 비길 만큼 성대했다. 집에 들어오자 식구들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소진이 웃으면서 형수에게 ‘전에는 그렇게 야박하더니 어찌 이렇게 공손한가요(何前倨而後恭也/ 하전거이후공야)?’라고 말했다. 형수는 넙죽 엎드리며 사과했다. 지위가 높아지고 재물이 많아졌기 때문이라 대답한 데서 位高金多(위고금다)란 성어도 나왔다. ‘史記(사기)’ 蘇秦(소진)열전에 실려 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돈과 지위가 보잘 것 없으면 같은 식구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는데 사회서의 인간관계는 훨씬 더하다. 권세가 많은 세력가의 집이나 부자가 된 집에 줄을 대기 위해 門前成市(문전성시)를 이룬다. 그 사람이 별 볼 일없이 되면 문밖에 참새 그물을 칠 정도로 인적이 끊기는 門前雀羅(문전작라) 상태가 된다. 자주 찾아가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사람의 처지가 어떠하든 대하는 태도는 다름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 글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