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삭둥이 한명회 2편
■ 칠삭둥이 한명회 2편
계유정난(癸酉靖難)은 한명회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당시 수양대군의 장자방(張子房)으로서 계유정난의 전 과정을 기획하고 주도했고, 이후 세조, 예종, 성종 대까지 40년 넘게 세상을 쥐락펴락했다. 한명회는 세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고,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냈다. 살아생전 권신(權臣)과 외척(外戚)으로서 최고의 권력을 누렸고, 세조가 죽은 뒤에는 신숙주와 함께 예종과 성종대의 정국을 주도했다.
한명회는 국가 경영에도 수완을 발휘하여 북방을 안정시켰고, 그가 만든 면리(面里) 제도는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무려 2,300여 건이나 이름이 등장한다. 왕이 아닌 인물로서 조선왕조실록에서 한명회처럼 주목받는 인물도 드물다. 지금 시각으로 봐도 한명회는 조선 역사 상 최대의 간신 혹은 최고의 책사 그리고 최고 국가경영 지도자 등 여러 가지로 평가된다. 한명회는 개인적 인생으로도 최고의 인생을 살았고, 당시로서는 아주 장수한 73세 나이로 천수를 누렸다.
하지만, 저승에서는 편히 쉬지 못했다. 1504년(연산군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을 때 정창손 등과 함께 12간신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관작(官爵)을 박탈당하고 그 시체는 부관참시(무덤에서 꺼내 목을 벰) 되었으며, 참수당한 머리는 한양 네거리에 효수(梟首:높이 매담)되었다.
출생에 관해서 꽤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한명회의 이미지는 칠삭둥이다. 칠삭둥이로 태어난 것 때문에 체구가 작고 생김이 추했다고 전해진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한명회의 모습도 대체로 그렇게 보여진다. 그런데 의외로 그가 추하게 생겼다는 사실을 문헌상에서는 찾기가 힘들다. 실록에 나온 그의 기록에 칠삭둥이 얘기는 있지만 얼굴 생김에 관한 얘기는 없다. 한명회의 외모에 관해서 ‘그가 못생겼다’ ‘추하다’ 는 야담은 사실이 아닌 것 같지만, 한명회가 잘생긴 것은 아니더라도 남이 보기에도 뭔가 범상치 않은 외모를 가졌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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