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탕평책과 탕평채 3편
■ 탕평책과 탕평채 3편
영조는 백성들이 반란 세력에 합류한 일차적인 원인을 당쟁으로 판단하고 앞으로는 당(黨)과 사(私)를 옹호하는 마음 대신, 모두가 한마음으로 협력해 중흥의 기틀을 삼자고 호소했다. 무신란을 당파를 없애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영조의 정치적 의지가 보이는 장면이다. 무신란 이듬해인 1729년 영조는 기유처분(己酉處分:당파 간 의리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쓰겠다)을 통한 탕평을 반포했다.
영조는 당쟁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사림(士林) 등 유학자 집단의 정치 관여를 계속 견제했다. 은둔한 산림(山林)의 공론(公論)을 인정하지 않았고, 사림 세력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했다. 1741년 4월 8일 영조는 하교를 내려 팔도의 서원과 사묘(祠廟) 가운데 사사로이 건립한 것을 모두 없애고 이를 어길 경우 수령과 유생에게 엄한 처벌을 가하도록 했다.
영조가 탕평책을 적극 실천한 것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영조 시대는 각 분야에서 이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정치적 안정을 추구한 탕평책이 밑바탕이 된 덕분이다.
이렇듯 영조는 탕평책을 강력히 추진했으나, 이는 겉으로는 성과가 있는 듯했을 뿐 속으로는 서로 간의 대립이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양측의 휴전으로 정국이 안정된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날이면 날마다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는 지루한 논쟁만 계속되자 영조도 지쳐서 다시 자신의 원래 기반인 노론으로 기울게 되었다.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놓은 ‘탕평채’는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의 음식상에 처음 올랐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탕평채는 묵에 다른 나물을 섞어 무친 요리인데, 18세기 조선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책 《경도잡지》, 19세기 《동국세시기》 등에 탕평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영조가 신하들과 탕평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탕평채’라는 요리를 내놓았다는 이야기는 1940년 홍선표라는 인물이 쓴 《조선요리학》이라는 책에 처음 나온다. 정말로 탕평채가 탕평책에서 유래했고, 영조가 만들어 신하들에게 권한 음식이었다면 영조 시대의 기록이나 조선시대 어느 문헌에라도 그런 내용이 있을 법 하지만, 아직 이 주장을 뒷받침할 정식 기록은 없다.
탕평채에는 전통 사회에서 동서남북을 상징했던 4가지 색이 모두 들어간다. 녹두로 만든 청포묵(흰색), 쇠고기볶음(붉은색), 김(검은색), 데친 미나리(푸른색)가 주재료이다. 동양에서 서쪽은 흰색(白), 동쪽은 푸른색(靑), 남쪽은 붉은색(赤), 북쪽은 검은색(黑)을 의미한다. 그래서 탕평채 재료의 색깔이 조선시대 붕당정치를 펼쳤던 사색당파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이 역시 근거는 부족하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