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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8일 월요일

태실胎室 수난기 2편

■ 태실胎室 수난기 2편

■ 태실(胎室) 수난기 2편

서삼릉을 훼손하는 행위는 일제시대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대한민국이 탄생한 뒤에도 서삼릉은 지속적으로 훼손당해왔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사적 200호인 서삼릉 부지는 123만평이었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이런 저런 특례법을 만들어 1963년부터 1968년까지 이리저리 총 83만1649평이 매각되었다. 또한, 외곽순환도로가 서삼릉 태실과 회묘 바로 옆을 통과하여 건설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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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원(동물원)’이 서울대공원으로 옮겨가고 벚나무가 가득했던 유원지의 모습을 걷어낸 자리에 궁궐의 외형과 ‘창경궁’이란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이 1986년 8월이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이름을 잃었기 때문에, 아마도 창경원 시절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은 여전히 입에서 창경원 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때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 추억 속의 유원지 창경원의 모습이 동물원으로 또는 수학여행지로, 소풍지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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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창경궁’이 창경원이었던 기간은 일반 공개만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1909년부터 1983년까지 얼추잡아 70년이 훌쩍 넘는 긴 세월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원형복원을 추진하더라도 창경원 시절의 잔영을 말끔히 씻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지도 모른다. 원래 이왕가 박물관 본관이었던 장서각 건물을 1992년 11월에야 뒤늦게 헐어내기는 했지만, 지금도 창경궁 안에는 춘당지(春塘池)가 남아 있고, 대온실, 중국에서 건너온 보물 제1119호 팔각칠층석탑이 남아 있으며, 또 언제 반입된 것인지도 알지 못하는 오층석탑 하나도 명정전 뒤편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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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성종태실비(成宗胎室碑)’ 역시 창경원 시절이 남겨놓은 흔적의 하나이다. 궁궐 속에 태실(胎室)이란 것도 어색하거니와 그것도 왜 하필이면 성종대왕의 것이 창경궁에 와 있는 것일까? 국왕의 태실로는 드물게 원래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태전리에 있던 ‘성종태실비’가 1928년 이왕직(李王職)의 손을 거쳐 이곳 창경원으로 옮겨졌다. 그 무렵에 이왕직에서는 전국 각처에 흩어진 왕실 태항아리를 수습하여 서울로 옮겨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대개 태실의 석물은 현지에 내버려둔 채 태항아리만을 수습해 오던 터라 그 모습을 보전하기가 힘드니까, 그중에 상태가 가장 좋은 성종태실 하나만을 골라 석물 일체를 창경원 쪽으로 옮겨오기로 했다는 웃픈 뒷얘기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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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