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실胎室과 태항아리 2편
■ 태실(胎室)과 태항아리 2편
태의 처리를 위해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를 했으며, 아기가 태어나면 왕실은 물론 민간에서도 태를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었다. 태항아리는 외항아리와 내항아리로 이루어져 있다. 내항아리에 태(胎)를 담은 후, 외항아리 속에 내항아리를 넣어 봉했다. 봉해진 태항아리를 좋은 땅에 묻으며 아기의 건강과 미래를 기원했다. 그럼 좋은 땅이란 어떤 곳일까? 우선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듯 하고 있어야 했다. 이런 곳을 길지(吉地)라 불렀다.
영아 사망률이 높고 평균수명이 짧았던 당시, 남자 아이는 가문의 대를 이을 존재였고, 태는 생명의 근원으로 간주됐다. 때문에 아기의 태를 몹시도 중하게 여겼던 당시 왕가에서는 왕족의 남아가 태어나면 아기의 태를 아름다운 항아리(주로 백자)에 담아서 길일을 택하여 매장하는 풍습이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풍습이 왕가뿐 아닌 양반 가정에도 점차 전해지고 나중에는 일반 백성들도 이 풍습을 따랐던 것이다.
다만 구별 되는 것은 왕가나 양반들은 백자나 값나가는 항아리를 사용 했고, 일반 백성은 질 항아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풍습은 근대까지도 전해져서 시골이나 산간 지방에서는 가끔 아장사리터라해서 그 흔적이 발견되곤 한다. 보통 서민들이 사용하던 장소는 돌들이 많은 곳을 택했는데, 그곳을 약간 파고 항아리를 묻고 그 위를 돌로 덮었다. 왜 하필 돌로 묻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아기를 묻으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밤이나 새벽녘에 간편하게 작업을 하려고 그랬던 것 같다.
"또 다른 왕실과 민간의 차이점은, 왕실은 길지를 전문가들이 전국을 대상으로 찾았고, 민간에서는 동네 뒷산이나 마당에 묻었다는 것이다. 왕실에서 왕의 자녀가 태어나면 관상감에서 태항아리를 묻을 좋은 터와 날짜를 따로 잡아서 안태식을 크게 치르고 태를 묻었다. 특히 왕세자의 태는 장래의 국운(國運)과도 관련이 크다 하여 의식에 더욱 정성을 쏟았다. 그러므로 태를 수습하고 태실을 만드는 일은 왕실의 일이기도 했지만 국가적 사업이기도 했다. 이 일을 관할하던 관청이 ‘관상감’이란 곳이고, 이를 관장하는 관리는 ‘안태사’였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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