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정비결과 이지함 1편
■ 토정비결과 이지함 1편
언제부터인가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보는 것이 대표적인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아주 오래된 전통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조선시대 새해 풍습을 기록한 문헌에는 이런 사실이 등장하지 않는다. ‘토정’이라는 호의 주인공이 조선시대 학자 이지함(李之菡:1517~1578년)임을 아는 사람은 이 책을 당연히 그의 작품으로 믿고 있다. 《토정비결(土亭祕訣)》은 이지함(李之菡)이 의학(醫學)과 복서(卜筮:갈흉을 점침)에 능하다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찾아와 1년의 신수를 보아 달라는 요구로 지은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여러 연구에 의하면 《토정비결》은 이지함의 이름을 빌려서 저술된 책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여 진다.
《토정비결》이 이지함의 이름을 후대에서 빌려 썼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는 숙종 때 그의 현손 이정익(李楨翊)이 이지함의 유고를 모은 문집인 《토정유고》를 간행할 때 《토정비결》을 포함하지 않은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토정비결》이 이지함이 세상을 떠난 16세기가 아닌 300여년 지난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도 가탁설(假託說:이름을 빌려 썼다는 설)을 뒷받침해준다.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조선 후기 풍속 전반이 기록돼 있는데, 새해 신수를 보는 점으로 오행점(五行占)이 언급됐다.
정조 때 유득공이 서울의 세시풍속을 적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도 새해 풍속 부분에 ‘윷을 던져 새해의 길흉을 점친다’는 기록이 있지만 《토정비결》에 대한 언급은 없다. 《토정비결》이 조선시대에 유행했다면 위에서 언급한 책에 당연히 기록됐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토정비결》은 16세기를 살았던 이지함이 지은 게 아니라 후대의 누군가가 이지함의 명성을 빌려 쓴 책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토정비결》에는 이지함의 사상과 유사한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토정비결》의 저자(著者)로 알려진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은 조선시대 실학의 선구자였으며, 기인(奇人)으로 알려져 있다. 이지함의 자는 형백 호는 토정,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이지함은 고려 말의 성리학자 이곡과 이색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으로, 이색은 이지함의 7대조가 된다. 이곡과 이색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이색의 아들 종선은 관직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이후 이지함의 가문의 영예는 조금 퇴색하는데, 조부 장윤과 부친은 각각 현감과 현령 직에 머물렀다.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