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정비결과 이지함 3편
■ 토정비결과 이지함 3편
이지함은 매우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신분이 미천한 사람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문인으로 받아들였으며,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격의 없이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지함은 전국을 유랑하며 현지 주민들에게 장사하는 법과 생산기술을 가르쳤으며, 자급자족 능력을 기를 것을 강조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접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쳤다. 자급자족의 기반을 마련해주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걸인청(乞人廳)을 설치했다.
이지함은 탁월한 장사꾼이었다. 그는 수완이 좋아 장사를 할 때마다 매번 많은 이윤을 남겼다. 그러나 이지함(李之菡)은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번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장사를 해서 번 돈을 곡식으로 바꾸어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어 수만 개를 수확해 바가지를 만들어 곡물 수천 석과 교환하여 빈민을 구제하기도 했다. 이렇듯 백성들과 함께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모습이 후대에도 길이 기억되면서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주인공으로 남았고, 현재까지 그 이름이 회자(膾炙)하고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토정비결》에 투영된 이지함의 사상과 주장은 그의 이름 석 자를 널리 알렸고, 백성의 편에 서서 살았던 한 지식인으로 후대에까지 널리 기억하게 하고 있다.
이지함(李之菡)은 사화(士禍)의 소용돌이 속에 출사(出仕)를 단념했으나, 잠깐 동안 경기도 포천 현감을 하면서 남긴 기록이 있다.
『포천현의 형편은 어미가 없는 고아(孤兒) 비렁뱅이처럼 오장(五臟)이 병들어서 온 몸이 초췌하고 고혈(膏血)이 다하였으며, 피부가 말랐으나 죽게 되는 것은 아침 아니면 저녁입니다.』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도의 형편이 이러 하였으니 다른 곳은 얘기할 것도 없었다. 이러한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직접 접한 이지함(李之菡)은 조정에 땅이며 바다를 따질 것 없이 개발하여 국부(國富)를 늘리고, 백성들을 자급하게 하는 것만이 깊어진 병통을 치유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조정의 썩어빠진 관료들은 그의 주장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토정유고》를 비롯하여 《연려실기술》이나 《어우야담》 등의 기록에 나오는 이지함에 관한 일화들은 백성들의 편에 섰던 이지함의 치밀한 계획과 적극적인 실천 모습이 나타나 있다. 명문가 출신의 선비가 백성의 이익을 위해 말업(末業)으로 치부되던 수공업·상업·수산업에 직접 종사했던 것은 참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